혼자서도 씩씩해요.

그림책 ㅣ 섬, 눈물바다, 빨간 나무

by 핀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도시의 새 학교로 전학하고 몇 달 뒤, 엄마는 내 생일파티를 앞당겨 열어 반 친구들 모두를 초대해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몇몇 친구가 오겠다고 대답했고, 난 날아갈 듯이 기뻤다. 거실을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며 생일파티를 상상했다. 미리부터 커다란 상 위에 뭘 놓을 거냐고 물으면서 엄마를 끈질기게 귀찮게 했다. 전날, 아빠와 색색깔의 풍선을 지칠 때까지 불어 여기저기 달고, 화장지로 물결모양을 내서 커튼 위를 장식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 나는 통통거리는 마음에 얼굴이 살짝 발갛게 달아오른 채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오늘따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눈은 분명히 선생님을 보고 있는데도 자꾸 선생님 말씀을 중간에 놓쳐서 깜짝깜짝 놀랐다. 1교시가 끝나고, 미진이와 지수가 생일파티에 못 가게 되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말끝을 흐리며 미안하다고만 했다. 2교시가 끝나고, 수영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수영이도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얼른 머릿속으로 생일파티에 오겠다고 한 친구들의 숫자를 헤아려봤다. 아직도 다섯 명은 넘게 남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말씀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수업이 다 끝나고, 오기로 약속했던 친구들이 멀리서 나를 힐끔거릴 뿐 내 가까이 오지를 않았다. 그때, 우리 반 여자 '짱'인 성희가 말했다. “가자!” 우리 반 여자아이들 모두가 성희의 뒤를 따라 교실을 쑥 빠져나갔다. 내 옆으로 은지가 소리 없이 다가와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성희가 오늘 과자파티를 연대.” 난 혼자 타박타박 집으로 걸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우리 반 남자 '짱'인 승규가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생일파티에 와줬다.


재수 없는 아이

나는 왕따였다. 조금씩 나아질 거라 생각한 나의 학교 생활은 점점 버거워졌다. 투명인간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짝을 지어야 하거나 모둠 활동을 해야 할 때는 늘 진땀을 나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성희는 종종 나를 복도로 불러내 큰 몸과 큰 목소리와 큰 웃음으로 키 작고 말랐던 나를 짓누르며 위협했다. 분명 몸은 덜덜 떨렸지만 난 얼굴을 찡그리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성희는 내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면서 마시던 우유를 바닥에 내던졌다. 내 옆에 서 줄 친구는 없었다. 난 전학생인 주제에 선생님한테 매일 칭찬을 듣고, 승규가 챙겨주는 '재수 없는 애'라는 딱지가 붙은 아이였다. ‘모든 것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왕따를 당할 만하니까 당하지. 넌 재수 없어.’라는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애써 귀를 막았다.


씩씩한 나는 눈물을 말끔하게 닦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오늘도 엄마는 집안일을 다 해놓고, 안방에 이불을 깔고 누워 계셨다. 머리맡 카세트에서는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김수희의 ‘애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른 들어와.” 엄마는 이불을 번쩍 들어 올려 동굴을 만들었다. 나는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그 속으로 쏙 들어갔다. 온몸의 뼈들이 큰 숨을 내뱉었다. 엄마는 이불 위로 내 등을 퍽퍽퍽 때리고는 급기야 “항복해라!”라고 외치면서 숨 막히게 나를 안았다. “항복, 항복!” 난 다 큰 초등학생이었지만 엄마의 냄새가 배인 부드러운 티셔츠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학교는 어땠냐는 물음에 오늘도 명랑한 목소리로 “응! 재밌었어!”라고 답했다.


내가 이겼다고 우겼다. 나를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 후로 친구들 사이에서 사랑받기 위해 살았다. 인기 많은 친구들 옆에 서고 싶어 공부를 하는 대신 춤을 추고 시내에 나가 옷 쇼핑을 했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혹시 회장이 되면 미움을 살까 봐 예비투표에서 1위로 추천이 되어도, 뭐가 문제냐며 선생님께 불려 가도, 한사코 회장 따위는 거부했다. 선생님이 혹시 나에게 칭찬이라도 한마디 하면 너무 싫어서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던져졌을 때는 오히려 콤플렉스라는 괴물이 덮쳤다. 잘나거나 특별한 사람이 인기가 많은 세상이었다. 친구의 사랑을 갈구하고, 친구의 질투를 견디지 못하는 아이를 벗어나, 내 모습 그대로를 보일 수 있는 친구 몇 명을 만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등 뒤에 붙어 인기를 먹고사는 그림자를 하루빨리 떼 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난 왕따를 당했던 그 일 년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지만, 내 안의 어린아이는 10년이 넘도록 울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강해서 끝까지 혼자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다. 내게는 나를 완전히 혼자 두지 않았던 은지가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뭐든 해 줄 것이라 믿었던 엄마 아빠가 있었다. 첫사랑, 승규가 있었다. 나는 왕따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몇 달 전, 그림책방에서 아민 그레더의 ‘섬’이라는 책을 무심하게 휙휙 넘기다가 한 장면에서 멈칫했다. 왼쪽 페이지에 그려진 사람들이 들고 있는 창 끝에 내 가슴이 푹 찔렸다. 숨을 못 쉬었다. 얼른 책을 덮고,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불편한 장면이라 생각하고 잊으려는데 그 작고 벌거벗은 이방인의 모습의 이미지가 계속 생살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섬> 아민 그레더 지음, 김경연 옮김 / 보림


이 그림책은 소수를 이방인으로 여기는 다수의 편견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끔찍한 폭력을 고발한다. '혹시 당신은 다수의 편에 서서 소수에게 어떠한 형태의 폭력이든 가한 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독자는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이 장면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 이방인이 어린 나의 모습과 겹쳤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낯선 남자가 탄 뗏목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닿는다. 섬사람들은 자신들과 생김새가 다른 남자를 경계하며 염소 우리에 가두고 최소한의 음식만 준다. 배가 고파 마을로 나온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온갖 의심과 상상으로 왜곡된 소문을 퍼뜨리고 급기야 남자를 뗏목에 태워 쫓아낸다. 남자를 도우려 했던 어부의 배도 불태워버리고, 섬 둘레에 높고 높은 장벽을 쌓는다. 혼자 구석으로 몰리다 결국 쫓겨나는 남자, 불타는 어부의 배, 높은 장벽까지 차례로 본 내 안의 아이가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씩씩한 아이

우리 가족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하자마자 IMF가 터졌고, 엄마 아빠는 매일같이 싸웠고, 나는 왕따였다.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아이의 손을 이제야 잡는다.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다. 난 듬직하고 씩씩하니까 ‘이까짓 것으로 울면 안 되지.’하고 스스로를 달랬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오랫동안 별 거 아닌 일이라 여기며 잊어버리려, 아니 잊을 만한 일도 아니라고 내버려 두었었다. ‘매일같이 혼자 버티기가 많이 힘들지? 울어도 괜찮아. 무서울 때는 무섭다고 해도 돼. 가끔 어리광 부려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어른의 세계만 각박한 것이 아니다. 결코 아이들이라고 그 세상과 뚝 떨어진 유토피아에 살지 않는다. 아이의 삶의 무게도 무겁다. 어른의 시선으로는 별 것 아닌 것에 오늘도 아이는 상처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 상처 받은 마음을 내비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늘 잘 해낸다고, 언제나 씩씩하고 명랑하니 기특하다고 칭찬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미 스위치가 내려져 있어 깜깜할지 모르는 방 안에서 아이가 출구를 찾지 못한다.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도, ‘울지 않는 강한 사람’이라는 신념에 지배당할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난 웬만해선 감정을 삼켰다. 얼른 소멸시켜야 할 불순물이라 생각하고 처리하기 바빴다. 없애지 못한 잔여물들이 쌓이고 쌓여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도 있었다. 감정을 인정하고, 내 안에 충분히 머물다 떠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다.



<눈물바다> 서현 글 그림 / 사계절

서현의 ‘눈물바다’를 읽는다. 꽁꽁 묶어 둔 눈물 풍선을 바늘로 터뜨린다. 못 다 흘렸던 눈물을 바다로 흘려보내며 시원하게 가슴을 씻는다.











<빨간 나무> 숀 탠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숀 탠의 '빨간 나무'에서 아이가 멋진 빨간 나무를 키워낼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나에게도 빨간 단풍잎 하나를 선물한다. 아이에게 어둠이 밀려왔고, 아무도 아이를 이해하지 않았다. 모든 일은 한꺼번에 터졌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냥 아이를 지나쳐갔다. 끔찍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그 날의 아이를 안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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