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능한 미래와 예측 가능한 패턴의 반복, 그 사이에서
대학 시절. 아직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했던 때에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물론 지금도 '하고싶다'는 욕구를 여전히 충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커리어우먼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많이 하곤 했다.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소위 '알파걸'의 이미지를 연상하며 나름 장밋빛 미래를 꿈 꾸었던것 같다.
'내 자리'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계약직 시절을 지나 입사한 지 어언 3년 차. 개인의 발전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딱딱한 조직문화에 기대치는 이미 푹 꺾여 버린 지 오래다. 희망과 기대를 버려야 직장생활을 오래할 수 있다는 구전전승을 새기며 나는 자꾸 움츠러 들었다. 내부에서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눈은 자꾸 외부로 돌아갔다. 그렇게 바라 본 바깥 세상은 생각 이상으로 넓었고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분명 많은 것들에 관심이 있는데 막상 나만의 분야라고 지칭할 건 없었다. 아무래도 본업이 있고 오랫동안 취미로 관심 가진 게 없다 보니 파고드는 게 어렵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떤 것에 재능이 있거나 관심 분야에 긴 시간 노력을 기울여 온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일이야 하고 있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 틈에 도태되어 시대에 뒤쳐진 것 같았고 지금 하는 정도로는 남들과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새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회가 오면 잡아야지 하는 생각에 준비를 미뤄두다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막상 뭐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 온 거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다양한 배울 거리가 있는 세상에 나는 오로지 한 우물만 팠던 거다. 개인의 소질과 적성에 무관심했던 교육 시스템을 원망해야 할지 혹은 남들이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할 때에 시도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스스로를 원망해야 할지. 일단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시도했다. 물론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만큼 처음엔 망설임이 컸다. 그래도 안 해보고 또 미뤄두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활동들에 무작정 뛰어 들었다.
<1> 소셜살롱과의 만남, 크클러가 되다
'크리에이터클럽(이하 크클)'을 알게 된 건 19년도 9월쯤이었다. 본래 SNS 활동을 아예 하지 않아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여가생활이 별다를 게 없어 쉬는 동안에 눕는 게 일쑤였던 내게 이런 활동을 해보는 건 어떻느냐고 먼저 제안한 건 남자친구였다. 당시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남들처럼 성실하게 돈을 모으랴 아등바등 사는데 충실했기에 일과 무관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집과 회사를 오가는 반복적인 삶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권태로움이 찾아왔다. 마침 업무가 어느 정도 손에 익은 상황이었고 별다를 게 없는 일상이 지겨운 참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끝나버린 동아리 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셈치고 '크클러'로 활동하기로 마음 먹었다.
크클의 모임은 서울 소재 두 군데 장소(망원점, 강남점)에서 오프라인으로 진행된다. 활동기간은 3개월 단위로 연간 총 4번 모집하고 있다. 내가 처음 발을 담갔을 때보다 지금은 더 많은 활동들이 가능해졌지만 예전에는 짜여진 커리큘럼에 기반한 '정기모임'이 8할이었다. 여러가지 주제가 있는데 크게 '대화팀'과 '쓰기팀'으로 카테고리가 나뉜다.
참여자는 각 회차 별로 주어진 주제에 맞는 생각 혹은 글을 준비하면 된다. 오래 전부터 글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나는 취업준비생과 회사생활을 거치며 끊겨버린 글쓰는 일을 이어가고자 했다. 물론 한낱 개인의 일기장에 지나지 않은 끄적거림일지라도 쓰고 싶은 욕구를 발산하고 싶었다. 그래서 '쓰기팀'을 신청했다. 처음 신청했던 팀은 '관찰자들'. 늦게 신청한 터라 원하던 자리가 마감되어 선택지가 적었다.
사실 내가 처음에 크클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던 건 자기계발과 인맥쌓기를 위함이 컸다. 1년 여 정도 크클러로 활동하면서 적어도 나는 글쓰기에 취미를 붙이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틈에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기대할 법한 모습으로 변해야만 했던 순간도 있었다. 퇴근 후 힐링 같은 시간이 있었기도 또 다른 직장으로 출근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돈 낸 만큼 '뽕을 뽑자'는 일념으로 여럿 활동을 거쳤고 나는 2번의 크클러로서의 활동과 2번의 메이트 활동을 끝으로 크클을 떠났다.
첫 모임을 앞두고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그냥 집에 갈까?'하는 생각이 수십번 들었고 낯선 환경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일이 꽤나 두렵게 느껴졌다. 첫 모임에 가서 모르는 이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미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이 이들이 지킨다는 '문화'의 일환이라는 걸 깨달으며 나 역시 사회생활을 통해 갈고 닦은 사교성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크클에서는 나이와 직업이 비공개다. 상대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고 수평한 관계에서 대화를 하도록 함이었다. '편견 없는 대화를 위한 수칙'. 이는 많은 사람들이 크클에 매료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였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런 아이덴티티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데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크클에서는 모두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배려와 존중이 언행의 기본이 된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칭찬봇, 리액션봇이 되어야 했다. 내가 관심없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평소대로 심드렁한 반응을 내비치기보다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일상에서 쉽게 오가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기 때문에 때론 깊이 있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사회생활에선 대개 답이 정해져 있다. 그 때 그 때마다 오답을 내지 않기 위해 나를 정답에 끼워맞춰야 한다. 그래야만 기대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매번 실수 투성이다. 뭐가 정답인지 알기 어렵다. 저마다의 답이 다르기 때문에 남의 잣대로 나를 평가할 수 없다.
모임 때마다 읊게 되는 다섯 가지 대화 수칙은 크클의 가장 중심이 되는 아이덴티티다. 내가 메이트로 활동하면서도 가장 신경썼던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의 기초는 상호존중에서 출발한다. 대표가 오마주했다고 언급한 '스타인 살롱'과 같이 격식있는 토크를 추구하는 자리라면 당연히 필요한 기본 에티켓일 것이다.
크클에는 다양한 갈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특히 가장 많은 부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거나 미친 듯이 꿈과 목표를 향해 질주해 오다가 지쳐버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내면을 들여다 볼 생각으로 자신을 탐구할 수 있을 법한 주제를 고른다. 그래서 일명 '뉴클러'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팀은 '나 다시보기'팀이었다.
내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크클에 와서 자신의 속 이야기를 꽤 쉽게 털어놓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주변 인물들이 그 어려움을 가장 잘 헤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당시에 회사에서 팀원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해결되지 않은 고충을 크클에서 털어놓고 자문한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는데도 위로받을 수 있는 대나무숲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말하고 나서 속시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 하지 않고 못 견딘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꺼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차라리 가까운 이들에게 속내를 터놓고 조언을 구하는 게 더 현실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건네는 따가운 충고가 오히려 위로가 되고 성찰이 된다는 건 한참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모임은 대체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때론 자신의 깊은 생각을 나누고 싶어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취향이 개성있는 사람도 있었고 관심에 목마른 사람도 있었다. 말그대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행히 나는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과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불쾌한 인상으로 기억나는 사람은 몇 있다.
그 중에 한 명은 직업이 타투이스트였다. (크클 모임 중간 쯤 혹은 끝 무렵이면 직업 정도는 공개가 되곤 한다) '낯선생각'이라는 팀에 내가 '놀러가기'해서 다른 팀 모임시간에 끼어든 손님 입장이었는데, 그 사람은 말이 썩 유창하지 못했다. 분명 표현하는데 서툰 점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흥분하면 책상을 치는 등 저도 모르게 거칠게 나오는 언행이 있었다. 한껏 서로가 예를 갖춘 대화의 자리에서 단연 튀는 행동이었다.
당시에 관련해서 모임 진행이 불쾌했다고 크클에 피드백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별 일도 아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길 걸 괜히 남에게 일을 던져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