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점(critical point) pt.2

넘어선 그 이후의 삶

by 흔한여신
영혼이 성숙해지기까지 수 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여전히 인생을 배우는 중이라 나중에서야 지난 행동을 후회스럽게 되돌아보곤 한다. 최근에 책상을 정리하다가 올해 초에 쓰기로 맘먹었던 "오답노트"를 발견했다. 노트 이름을 TV 단편 드라마 제목에서 따왔는데 스스로 잘못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다짐으로 만들게 됐다. 그 뒤로 바빠진 탓에 방치해두었다가 오랜만에 다시 펴보니 고작 한 줄이 쓰여있었는데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하면 안되는데 **했다. 멍청한 잘못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스스로 부족한 점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았던 과거의 내가 대견하기도 했고 자책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다. 여전히 나는 자신에 대한 고삐를 바짝 쥐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슬럼프 이후 가장 큰 변화이자 현재의 나의 가장 큰 매력이라 자부하는 것은 '솔직함'이다.


숨기고 포장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꺼내는 것. 다행히도 사람들을 그걸 거북하게 여기기보다 매력있다고 받아들였고 덕분에 엉뚱한 모습까지도 솔직하게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해도 내게 이런 모습이 있었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내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한다. 꺼내놓고 보니 그렇게 밉상은 아닌데 뭘 그렇게 움츠러드렀을까.


반오십 쯤 되어서야 '착한 아이 컴플렉스'와 결별을 했다. 오랜 세월 가르침 받아온, 남들 기준에 맞춰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규율과 시선에 얽매이지 않게 된 영혼은 자유를 찾았고 이제는 타인을 따뜻하게 위로하기에 이르렀다. 공감능력. 그게 사실 내가 가진 비장의 무기였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내 기준을 믿고 행동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좋은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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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 감정의 파노라마도 여전하다.


기분이 천상으로 치솟았다가도 지하 깊숙이 처박히곤 한다. 그 흔들림이 비록 편안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견디면서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감정이 임계점까지 가서 어마무시하게 변한다면 더 이상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축적되어 상한에 도달하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봐야한다. 그런데 언제나 인위적 개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직장 동료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같이 근무할 때엔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 곱씹을 수록 밉기만 했던 그 동료는 대체 어떤 이유로 싫어하게 된 것인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 스트레스의 원흉이었다. 대략 정리해보자면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업무를 조율하고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혼자의 힘으로 일을 처리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는 게 익숙했던 동료는 서로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소통이 잘 되지 않자 불쾌감을 표출했던 나를 그 동료는 최대한 피하려고 애를 썼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충돌이 잦았던 것이다.


한 팀에 묶여 있을 때만 해도 세상에 이런 원수가 따로 없었다.그런데 갑작스럽게 내가 다른 팀으로 이동하면서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쌓여있던 부정적인 기억이 날카로웠던 탓에 그에 대한 분노를 지울 수 없었다. 곁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적인 기억들이 차츰 휘발된 것인지 어느 날 갑자기 괜찮아졌다. 허무하게도. 역시 시간이 약인건가 싶은 생각에 내 감정의 변이를 되짚어 보다가 문득 '임계점'을 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이유를 들 수도 있다. 역시 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거나 내가 다른 방면으로 집중할 게 많아져서라든가 하는 것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 괴로워했는데 느닷없이 괜찮아지다니. 모르는 새에 나는 또다시 어두운 터널을 걸어나온 걸까. 임계점을 지나고 나니 감정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내려온 모양이다. 모쪼록 내 마음에 또 다른 타격 없이 그대로 잠잠해지길 바라본다.


사람은 저마다의 모양과 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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