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이 주는 위로
어릴 적, 밥상에서 아버지는 종종 “국물도 좀 먹어라!” 하시며 따끔하게 훈육하셨다. 국을 먹을 때 언제나 건더기만 골라 먹는 나의 식습관 때문이었다. 왜 국물이 그리도 먹기 싫었을까? 아버지는 종종 “국물에 영양가가 다 들어 있다”, “자기 복을 남기는 거다”, “국을 끓인 엄마의 노고를 생각해야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들을수록 나는 국물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 국물은 마치 밥상머리의 적군 같았다.
혼나기 싫어서 나는 언제부턴가 “저는 국 안 먹어요.”라거나, 입맛 당기는 국일 때는 “국물은 아주 조금만 주세요.”라고 한 후부터 밥상엔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 둘을 출산했을 때조차 엄마가 끓여주신 미역국의 국물도 먹지 않았다. 엄마의 정성 어린 미역국을 싹싹 비우지 않은 것, 그리고 산모가 아이를 위해 미역국을 잘 먹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인지 모유 수유를 하지 못했고, 둘째를 낳고 나서는 마비가 와서 고생했던 일, 지금도 무릎이 시린 것이 왠지 미역국의 국물을 먹지 않았던 탓이 아닌가 싶어 후회된다.
후각과 함께 음식의 풍미를 느끼게 하는 감각이 ‘미각’이라면, '식감'은 이에 닿는 씹는 맛을 의미한다. 녹는 맛, 바삭한 맛, 아삭한 맛, 텁텁한 맛, 쫄깃한 맛, 물컹한 맛 등 다양한 식감들은 결국 나의 미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국물에는 이러한 씹는 맛이 없었고, 심심함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격이 음식 취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국물에 대한 나의 태도는 크게 변했다. 뜨거운 국물이 그리워지는 때가 많아졌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국물을 찾기도 하고, 감정 상태에 따라 국물의 따뜻함이 위로될 때도 있고, 심지어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아, 시원하다.”라고 할 때도 있다. 어릴 적에는 느끼지 못했던 국물의 특별한 맛을 이제는 이해하게 된 걸까?
또한 남편의 식습관도 내가 국물을 먹는데 한몫을 했다. 국이나 찌개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 그 취향을 맞추다 보니 국물 요리를 보글보글 끓이는데, 항상 양이 많아진다. 남은 음식을 버리기 아까워 먹다 보니 국물을 먹게 된 것이다.
살면서 국물의 맛을 점점 알아가게 되었고, 최근에는 아버지의 말씀도 자주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국물에는 대단한 힘이 있다. 온 가족이 뜨거운 국물 요리 앞에서 “뜨거우니까 호~ 불어 먹어”라고 얘기하면서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아 먹던 어린 시절, 친할머니가 해주셨던 물김치의 시원한 국물 맛, 엄마가 여름마다 흰콩을 불려 손수 갈아 만들어 주셨던 고소한 콩국수 국물, 얼큰한 김칫국 한 숟가락. 이 국물들은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이제는 식감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한 그릇의 따뜻한 국물을 통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국물을 즐기고 싶다.
국물을 정말 싫어했던 내가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식감에 대한 취향이 변하는 것을 보면, 한때 싫어했던 것이 바뀔 수 있고, 때로는 위로가 되어 옆에 있어 주기도 한다. 나에게는 국물이 그렇다.
미각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식감이었다. 누구나 취향과 습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국물에 대한 나의 변화는 단순히 음식에 대한 취향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와 함께 성장한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의 일부가 된다"는 철학자 루이스 마우렌테(Louis Malerante)의 명언처럼, 우리의 음식 취향과 습관은 우리 자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국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함과 위로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남편 저녁 밥상에 자작자작하게 된장찌개를 끓여 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