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낯선 조각, 그 안의 알싸한 향
작년 여름, 유난히 뜨거웠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쨍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갈증이 밀려왔고 후끈한 열기에 지쳐 발걸음은 자연스레 역 앞 백화점 1층 카페로 향했다. 사실 백화점 안에 있는 카페들은 대부분 오픈된 공간이라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흩어지고, 오가는 이들의 시선에 괜히 신경 쓰이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프랜차이즈나 로컬의 아늑한 카페들보다 장시간 앉아 여유를 부리기는 다소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었기에, 이곳 역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잠시 더위만 식히려 들어간 곳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카페는 꽤나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을 뿐 아니라, 흥미로운 존재가 눈에 띄었다.
공간을 나눈 낮은 책장들 덕분이었다. 테이블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구분해 주는 책장들은 섬세한 파티션처럼 아늑한 독립감을 주었다. 책장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세련된 표지의 책들이 흥미롭게 배열되어 눈길을 끌었다. 벽면은 책뿐만 아니라 오브제, 식물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이루고 있었다. 은은한 재즈 선율은 카페의 차분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천장에는 독특한 형태의 조명이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고,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화분은 싱그러운 생기를 더해주었다.
그러는 사이 커피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주는 진동벨이 테이블 위에서 요란하다.
쟁반 위에 놓인 커피잔을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뭉툭하고 투박하고 둥그런 유리컵. 오래전 우리 집 찬장뿐 아니라 옆집에도 있었던, 그 시절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컵이었다. 여름날 외할머니가 커다란 양푼에 미숫가루와 설탕을 넣고 타서 얼음까지 동동 띄워 그 유리컵에 담아주시곤 했는데, 마루에서 벌컥벌컥 마셨던 기억이 났다. 유난히 고소하고 달콤했었다. 땀 흘리며 뛰어놀다 들어와 할머니가 건네주시던 그 뭉툭한 유리컵은 차가운 위로였다. 컵을 통해 전해지던 할머니의 거친 손의 감촉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둥그런 컵의 높이에 맞춰 반으로 뚝 잘린 듯한 진한 은색 빨대는 왠지 모르게 엉뚱하고 귀여웠는데, 커피를 테이블에 옮겨 놓다가 더 재밌는 걸 발견했다.
“어머나, 커피잔 받침 어쩜, 왜 책을 찢었을까?”
커피잔 아래에는 책의 한 페이지가 찢겨 접혀 있었서 그저 실수로 놓인 조각인 줄 알았다. 무심히 그리된 듯 보였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어슷한 접힘 속엔 의도가 있어 보였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가만히 펼쳐보았다.
‘사실 생강빵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강 빵이 아니라 금종이 별이다. 메리 포핀스와 아이들은 빵을 사러 그 가게에 갔고, 빵을 먹으려고 그걸 샀지만, 이 이야기에서 정작 중요한 소재는 빵이 아니라 그 빵을 예쁘게 장식하는 포장 종이인 것이다. (메리 포핀스는 빵을 산 걸까, 종이를 산 걸까? 어느 쪽이 진짜 목적이었을까?)’
뜻밖에 우연히 만난 문장이었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저 더위를 잠시 식히려고 무심코 들어온 카페에서, 나는 정말 커피 한 잔만 마신 걸까? 낡은 유리컵을 보는 순간 떠올랐던 그리운 외할머니와의 추억, 그리고 찢어진 책 페이지에서 발견한 삶의 질문까지. 어쩌면 나는 커피와 함께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 그리고 맛있는 생강 빵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짧은 이야기를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정갈하게 인쇄된 책 전체가 아닌, 뜯긴 한 페이지의 글귀가 이토록 강렬한 울림을 주다니. 어쩌면 삶의 진실은 완벽한 형태가 아닌, 예상치 못한 조각 속에서 불현듯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페 문을 나서는 순간, 따뜻한 대접을 받은 듯 기분이 포근했다. 분명 커피를 마셨을 뿐인데, 묘하게도 매콤하면서 알싸한 생강 맛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그 여름날의 기억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조각이 만들어낸 특별한 순간이었다. 카페의 분위기, 레트로 무드의 유리컵, 그리고 찢어진 종이 한 장이 건넨 낯선 우연을 하마터면 무심히 놓쳐 버릴 뻔했다. 그 하루는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고, 이제는 사라진 그 카페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