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실험적 미술 - 20세기 전반기
이제 20세기 전반기, 바로 한 두 세대 전의 미술 이야기다.
이 <The Story of Art>는 1950년에 초판이 발행되어 1966년에 추가 보완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곰브리치는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에서 박사까지 공부하고 영국에서 활동한 미술사 학자이다. 2001년 사망하기까지 오롯이 20세기를 보낸 자이다.
그런 그에게 이번 장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바로 저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용도 방대하고 자신의 의견도 더 많이 담겨있다.
곰브리치는 본인이 살았던 이 시대 미술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실험적 미술'
'실험'에는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계속되는 실험 수행과정에서 위기, 좌절의 고통이 수반되기도 한다.
고통 끝에 보장된 결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선 미술가들은 실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꺼이 '실험하는 반항아'들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모든 구태의연한 관습들을 쓸어버리기로 했다.
새로운 현대적 양식을 실험하는 데 가장 성공한 미술 분야는 '건축'이었다.
19세기 다양한 표현 양식이 공존하는 가운데 미술가들이 어떻게 '아르 누보'라는 실험적 운동을 이끌어냈는지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20세기 건축은 아르 누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기발한 창안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미래는 양식이나 장식의 편견에서 탈피하여 새로워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 시대의 젊은 건축가들은 건축이 예술(fine art)'에 속한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장식을 거부하였으며 건축을 그 목적에 비추어서 새롭게 보자고 제안하였다.
건축에 대한 이러한 참신한 접근 방법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전통이 기술적 발전을 짓누르지 않았던 미국에서 가장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 뉴욕과 시카고의 마천루를 유럽의 고딕이나 바로크, 르네상스식을 적절히 혼합해서 건축한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공정이 되었겠는가?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 1869-1959)는 주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이지 건물 정면의 외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건축물이 거주하는 사람의 요구와 지방의 특색에 따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발생하고 성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이는 매우 혁신적 견해였다.
명확한 건물 윤곽, 단순한 형태의 건물은 이러한 선구자들의 실험과 공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독일 사람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데사우(Dessau)에 설립한 바우하우스(Bauhaus) 건축 학교이다. 이 학교는 미술과 기계 기술이 19세기처럼 분리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상호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건축물과 가구의 설계를 실습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활용하고 대담하게 실험하되 그 설계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철제 파이프 의자나 이와 비슷한 일상용 가구가 처음 고안된 곳도 바로 이 학교에서였다.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은 '기능주의(functionalism)'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이는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그에 따라서 형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신념이다. 기능과 미(美) 사이에 숨겨진 조화를 발견하기 위해서 당시 건축가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우리의 관점으로 20세기부터 지금까지 '현대 미술'이라 통칭하지만... 먼 후대에 불려질 호칭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래 22세기 혹은 23세기를 살게 될 후대인들은 지금의 현대 미술에 대해 어떻게 특징 지우고,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러한 궁금증을 품고, 20세기 전반기의 미술을 바라보고자 한다.
"초현대 회화를 그리는 반항아들이 발달시킨 형태와 색채 구성은 현재의 상업 미술에서 상투적으로 써먹는 것이 되었다. 포스터나 잡지 표지, 옷감에서 그러한 것이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평범하게 받아들인다. 현대 미술은 형태와 무늬를 결합하는 새로운 디자인 방법을 실험하기 위한 장으로서의 역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61쪽 중)
거의 한 세대 뒤에서 바라본 곰브리치의 평가는 이러했다. 이렇게 이어지는 미술 회화와 조각의 실험과 발견! 이제부터 그것들을 추적해보려 한다. 편의상 당시의 미술 사조로 나누어 정리해보았으나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는 미술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다양한 변화를 꾀하는 작가들이(예를 들어 피카소)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 스스로 현대 미술의 크고 작은 흐름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종종 헷갈리기도 하였음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해 아래 온전한 새 것은 없다."
인간의 생각을 함축된 이미지로 표현하는 20세기 화가들의 그림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점이다.
그들의 그림이 원시시대 미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강렬한 표현성, 명쾌한 구성, 솔직하고 단순한 기법을 지니고 있는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은 옛 원시미술을 업그레이드시킨 듯 여겨질 정도이다. 옛 것과의 차이라면 바로 이것 - '독창성을 추구하는 미술'이라는 점이다.
원시 시대 미술가들이 실재하는 얼굴을 모사하기보다는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얼굴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1장에서 살펴본 바 있다. 또한 이집트인들도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알고 있는 것을 그림 속에 표현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미술은 이러한 도식적인 형태에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중세 미술은 종교적 주제를 다루기 위해 다시 이 도식적 형태를 이용하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
머릿속에 알고 있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 두 가지에 인간의 감정과 느낌을 더해 과감히 표현하기로 작정한 20세기 초 화가들의 강렬한 그림 앞에 서본다.
위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표현주의 화가들은 삭막한 현실을 직시하고 불우하고 추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려고 했다. 예쁘장하고 매끈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일체 피하고 브르주아의 현실적 또는 가상적인 자기만족에 충격을 주는 것이 그들의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위 작품들은 포스터나 만화와 같은 강렬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독일에서의 표현주의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제를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던 미국인 화가 휘슬러를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음악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시각적인 음악에 대한 꿈을 제시해주었다.
뮌헨에 살았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또한 진보와 과학의 가치를 싫어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랐던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른바 '추상 미술'이었다.
추상 미술은 비대상(non-objective) 또는 '비구상'(non-figurative)이라는 용어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칸딘스키는 저서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1912)에 순수 색의 심리적 효과애 대해 언급하였다. 이를테면 밝은 빨간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 색채 치료'로 이어지는 데 기여한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20세기의 화가들은 왜 자연 앞에 앉아서 자기 능력을 다해 그것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화가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단순한 명제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눈으로 본 것을 그린다는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그 인습은 미술가로 하여금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을 그리기보다 배워서 아는 형태를 그리도록 유도했다. 19세기의 반항아들은 이 모든 관습을 쓸어버리자고 제안했었다. 그리하여 인습들은 하나하나 쓰러지고 마침내 인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수법이야말로 '과학적인 정확성'을 갖추고 시각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을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었단 것이다.
당시까지의 유럽회화 전통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미술운동의 하나로서 입체주의가 일어난 곳은 파리이다.
지난 시간 세잔, 쇠라 등 19세기 말의 화가들이 질서, 구성, 형태를 추구하려는 절실한 요구가 있었음을 살펴보았었다. 단순화된 아름다운 형태를 탐구하려는 이들의 활동에 한 가지 특수한 문제가 드러났다. 아름다운 평면적인 형태와 입체성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1905년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레 포브(Les Fauves). 즉 '야수' 또는 '야만'을 뜻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불리게 된 까닭은 그들이 자연 형태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격렬한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 1869-1954)였다. 그는 장식적인 단순화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마티스는 오리엔트의 양탄자와 북아프리카 경치에서 색채의 짜임새를 연구했고 현대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양식을 발전시켰다."(571쪽 내용 중)
이 도판은 〈후식(La Desserte)>이라는 제목을 가진 1908년의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티스가 보나르가 개척한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나르가 여전히 빛과 광채의 인상을 보존하려고 했던 반면, 마티스는 더 나아가 눈 앞에 전개된 장면을 장식적인 패턴으로 변형시키려고 하였다. 벽지의 디자인과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 있는 식탁에 깔린 식탁보가 서로 어우러져 이 작품의 주된 모티프를 형성하고 있다. 인물과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도 이 패턴의 일부가 되고 있다. 여인과 나무의 윤곽이 매우 단순화되어 있고 벽지의 꽃무늬와 어울리도록 형태마저 왜곡되어 있어 더욱 일관성 있게 보인다. 처음에 화가는 이 그림의 제목을 휘슬러의 그림 제목들을 연상시키는 '빨강의 조화'라고 붙였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밝은 색채와 단순한 윤곽에서는 어딘가 어린아이의 그림에서처럼 장식적인 효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점은 그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약점이기도 하다.
마티스의 위대한 계시를 누구보다도 감명 깊게 받아들인 사람은 바로 스페인 출신의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 1881-1973)였다. 그는 데생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열아홉 살 되던 해에 파리로 건너가서 표현주의자들이 즐겨 다루었던 주제인 거지, 부랑아, 서커스의 광대 등을 그렸다. 그러나 여기에 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갱이나 어쩌면 마티스도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원시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요소들로부터 얼굴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전의 화가들은 자연의 형태를 평면적인 패턴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러나 청년 피카소는 그러한 평면성에서 탈피하여 입체감과 깊이감을 유지하는 그림을 고민했다. 그로 하여금 세잔의 방식으로 되돌아가게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잔은 자연을 구, 원추, 원통의 견지에서 보라고 그에게 충고하였다.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은 이 충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림을 그리기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기를 포기했다. 그것은 추구할 가치가 없는 도깨비불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변해가는 가상적인 인상을 캔버스에 고정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세잔처럼 가능한 한 소재가 가진 확고하고 변함없는 모습을 포착하여 그려보자.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어떤 것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물건,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생각할 때 신체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과 마음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본 바이올린의 형태를 한 순간에 생각할 수 있다. 그 형태들 가운데 어떤 것은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분명하게 떠오르고 어떤 것은 흐릿하다. 단 한순간의 스냅사진이나 꼼꼼하게 묘사된 종래의 그림보다 이상스럽게 뒤죽박죽 된 형상들이 '실재(實在)'의 바이올린을 더 잘 재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피카소의 바이올린을 소재로 한 위 정물화 같은 작품이 그려졌다. 이 작품은 어떤 면으로는 소위 이집트인의 원칙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원칙이란 사물의 특징적 형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각도에서 그리는 것을 말한다.(이전 이집트 미술을 다룬 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위 그림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형태들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것처럼 보여도 결코 혼잡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얼마간 균등한 요소로 구성하고 있어 화면 전체가 일관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의 형상을 구축하는 이러한 방법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익숙한 형태에 한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입체파 화가들이 기타, 병, 과일 그릇, 때로는 인물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를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익숙한 소재가 등장해야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각 부분 사이의 연관을 이해하고 그림 전체를 쉽게 해독할 수 있다. 그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평면적인 단편들로부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입체적인 사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 복잡한 게임을 자기와 함께 하자고 감상자들을 초청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모든 시대의 미술가들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깊이감을 재현한다는 회화의 본질적인 역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왔다. 입체주의는 이러한 새로운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실험하고 시도했다.
야수파는 색채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 명암법을 희생시켰던 반면에, 입체파 미술가들은 그런 색채의 즐거움을 단념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입체 표현의 전통적인 기법과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그렇다고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는 다른 모든 방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미술 화법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우 대담한 실험에서부터 가장 전통적인 미술 양식까지!
"나는 그림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다. 어떤 그림도 말로써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피카소는 자신의 노련한 그림 솜씨를 던져버리고 어린아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무엇인가를 이색적으로 그려댔다.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이 손을 놓은 곳에서부터 계속 실험해 나아갔다. 많은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태'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입체주의 미술가들에게는 항상 '형태'가 먼저이고 '주제'는 그다음의 문제였다.
그 밖의 입체파 화가들인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라이오넬 파이닝어(Lyonel Feininger : 1871-1956)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아래 도판 게시로 간단히 넘어가기로 한다.
고갱이 주장했던 원시주의는 반 고흐의 표현주의나 입체주의를 향한 세잔의 방식보다 현대 미술에 훨씬 더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특별히 주목하게 된 화가는 앙리 루소(Henri Rousseau : 1844-1910)이다.
그는 전문적인 화가가 되기 위한 교육은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루소는 정확한 소묘나 인상주의의 기법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하고 순수한 색채와 명확한 윤곽을 사용해서 나뭇잎 하나하나, 잔디밭의 풀잎 하나하나까지 전부 묘사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힘차고 솔직하며 시(詩)적인 무언가가 있다. 소박하고 때 묻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부류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루소처럼 소박한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이 우세하기 마련이었다.
루소와 '일요화가(Sunday Painter)'들이 독학으로 터득한 소박한 방식에 감탄한 화가들은 표현주의나 입체주의의 복잡한 이론을 불필요한 짐으로 생각하고 팽개쳐버렸다. '현실적'이고도 ‘진솔해져서’ 평범한 사람도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그리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었다.
또 한 명의 주목할만한 미술가가 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직전 러시아의 작은 유태인 마을에서 파리로 온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 1887-1985)이다.
샤갈은 현대 미술의 여러 가지 실험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마을 풍경이나 악기와 한 몸이 되어 있는 음악가와 같은 재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은 진정한 민속 미술이 지닌 묘미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경이감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샤갈의 그림은 신분과 연령, 국적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고향 - 쉼터'와 같은 기능을 제공해주고 있다.
'치유'가 일어나는 그림!
이런 어린아이의 솔직함과 단순함은 결코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어린아이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의 필명이 '아이얼(아이의 얼)'이다. 난 샤갈이나 루소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순전한 영혼으로 주변을 탐색하며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내 필명 '아이얼'이 내 글에 배어있기를 늘 원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은 1924년 즈음, 앞서 언급했듯이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려는 젊은 미술가들의 열망을 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 계 미술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 1978)는 예기치 못한 것이나 완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과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 엄습해오는 낯선 느낌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적인 재현 수법을 사용해 기념 조각의 고전적 두상과 거대한 고무장갑을 황량한 도시 속에 결합해 놓고는 거기에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 : 1898-1967)는 초현실주의자'로 자처한 일군의 미술가들 중에서도 유명한 일원이었다. 그가 그린 이 그림〈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라는 제목은 그의 미술 세계를 함축, 대변해주는 표어같이 여겨진다. 이 그림 속의 미술가(마그리트의 자화상?)는 아카데미의 기본 과제인 누드를 그리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마치 꿈을 꿀 때 그렇듯이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깨어 있는 사고가 마비되면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유아성과 야만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저작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예술은 완전히 깨어 있는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생산될 수 없다고 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성이 과학을 가능케 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비(非) 이성만이 우리들에게 예술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열망했다.
이렇게 꿈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실험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꿈속에서는 사람과 사물이 서로 합쳐지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해지는 장면들을 이루어낼 수 있다. 위 그림에서처럼 따로 또 같은 신사들이 비처럼 주룩주룩 하늘에서 쏟아지고, 물건들이 풍선처럼 빌딩 숲을 둥둥 떠다닐 수 있고, 우리 집 마당이 아프리카가 되기도 한다.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삼라만상의 세계! 그것을 그려대는 미술가들의 상상력에 힘입어 함께 여행을 떠나는 희열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상상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고, 그것을 적당히 누림으로써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왕이면 아름다운, 긍정적인 상상으로 가득 찬 그림 앞에 서고 싶다.
초현실주의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 1904-89)가 있다. 그는 꿈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이상야릇한 혼돈 상태를 모방하려 했다. 몇몇 그의 작품 속에서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단편들을 놀랍도록 잘 섞어놓았고,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치밀한 정확성으로 그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광기 있는 장면 속에 반드시 어떤 날카로운 의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윗부분에 꿈의 풍경인 파도치는 만(灣)과 터널이 뚫린 산 등이 동시에 개의 머리를 나타내고 있으며, 개의 목걸이는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高架) 철교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는 공중에 둥둥 떠 있고 그 몸뚱이의 중간 부분은 배가 담긴 과일 그릇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소녀의 얼굴로 연결되고 있다. 소녀의 눈은 해변에 있는 기묘한 조개껍질로 이루어져 있고 해변 위에는 그 밖의 많은 괴이한 환영이 가득 차 있다. 마치 꿈에서처럼 다른 형태들은 흐릿한 반면 밧줄이나 천 같은 것은 이상스럽게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작품에 대한 설명 중)
이것은 시에서 음률이 비슷한 단어를 나란히 사용함으로써 단어의 역할과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조개껍질이자 눈이요 과일 그릇이자 동시에 소녀의 이마와 코인 달리 작품의 형태들은 이 책의 제1장에서 언급된 아즈텍의 우신(雨神) 틀라록의 모습이 여러 마리의 방울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해 준다.
20세기 초의 현대 미술을 훑어보았다. 아직도 미처 언급하지 못한 훌륭한 미술가들이 많이 남아있다.
추상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 벤 니콜슨, 알렉산더 콜더, 헨리 무어 등등...
이미 언급된 화가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는 못 했다. 각 작가별 한, 두 작품의 소개만으로는 작가의 개성과 특징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미술사를 정리하면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저자 곰브리치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는 이번 장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미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어중간한 해결 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자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많은 부분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을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문득 내가 한동안 관심 가지고 활동했었던 '연극'이 떠오른다.
알다시피 연극의 3요소는 배우, 관객 그리고 희곡이다. 관객이 없는 배우는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다.
미술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무엇이든 이렇게 관심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결국 미술도 미술가와 우리들(관객)과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