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

24. 전통의 단절 -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프랑스

by 아이얼

미술의 근대화 과정 돌아보기


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는 화가나 조각가가 보통의 직업과는 다른 천직(天職)으로서 특별히 취급되던 르네상스 시대였다. 종교 개혁으로 교회 성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 유럽 대부분 지역 미술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대다수의 미술가들은 여전히 길드와 협회를 조직하였고,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돈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나 주택 장식품 주문에 의존하고 있었다. 비록 시대 변화에 따라 유행이 바뀌어도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전과 똑같았다. 미술의 목적이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당시 도제식 수업을 받고 세워진 미술가들에게는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술'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 그들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789 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본격적인 근대화가 무르익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은 18세기 초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건축 양식의 변화 - 고딕, 신 고전, 그리스 복고


첫 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팔라디오의 책 속에 나오는 규칙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인물은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이었다.


호레이스 월풀, 리처드 벤틀리와 존 츄트,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1750-75년경. 신고딕 양식 별장 / 우측 사진은 최근 도색한 모습


그는 스트로베리 힐에 있는 자신의 시골 별장을 정통 팔라디오 양식이 아닌 낭만적 고딕 양식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 건물의 양식도 선택하는 거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당연한 일들이 당시에는 이유(reason)를 찾아내 결단해야 하는 사건이 되었던 거다.



반면 건축가 윌리엄 챔버스(William Chambers : 1726-96)는 중국 거주 시의 경험을 기반으로 런던의 큐 왕립 식물원(Kew Gardens)에 중국식 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대대적으로 그리스 유적을 탐사하고 발굴하면서 그들은 오랫동안 오용해왔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재발견된 신전들은 팔라디오의 책에 나오는 고전 건축의 원칙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제 새로운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다.

영국의 많은 온천들이 호황을 누리던 이른바 섭정 시대(1810-20)에 '그리스 복고'의 형태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는 곳은 온천 마을이었다.


존 패프워스, <첼튼엄의 도셋 하우스>, 1825년경. 섭정 시대 건물의 정면


이 사진은 순수한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Cheltenham) 온천의 한 집이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하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신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토머스 제퍼슨,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1796-1806년.


이 집은 미국의 건국 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의 저택 몬티첼로다. 신고전주의(neo classical)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밖에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ek 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 이 양식이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 장식가들의 화사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제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태어난 아테네의 자유 시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고 말았다.



아카데미의 실과 허


'아카데미(academy)'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 나온 말로서, 나중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게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18세기에 들어서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미술학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미술학도들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켰다. 아카데미에서는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가르쳤다. 앞 장에서 영국 왕립 미술 아카데미 초대 원장이었던 레이놀즈 경의 강연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후원자들은 옛 거장의 작품들만을 사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당대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기꺼이 사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져야 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전시회의 시작


프랑수아 조제프 하임, '관전(官展)'의 새로운 역할:〈1824년 파리의 '살롱 전'에서 훈장을 나눠주는 샤를 10세>, 1825-7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이러한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주는 획기적인 행사였다. 이 사회적 행사는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전시회에는 화려하고 가식적인 것이 단순하고 진지한 것을 압도해버릴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화가들에게 있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림의 주제를 멜로드라마적인 것으로 선택하고 작품의 규모를 크게 하거나 요란한 색채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정말 큰 유혹이었다. 따라서 몇몇 미술가들이 아카데미의 '관학적'인 미술을 경멸했으며, 대중의 취향에 호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소외당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 충돌이 그동안 미술이 발전해 온 공통의 기반을 파괴해버릴 위험을 몰고 왔다.



위기가 새로운 기회로


이러한 심각한 위기가 즉각 불러일으킨 뚜렷한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림의 주제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성경이나 신화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인 미술가 역사화 그리기 시작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기여한 이는 미국인 미술가들이었다.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인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 1737-1815)는 이러한 전형적인 화가였다.


존 싱글톤 코플리, <1641년에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 1세>, 1785년. 캔버스에 유채, 233.4x312 cm, 매사추세츠, 보스턴 시립 도서관


이 그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당시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친구인 셰익스피어 연구가 말론(Malone)이 이 주제를 화가에게 제의하고 필요한 모든 시대적 고증 자료를 제공했다. 코플리는 찰스 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탄핵된 의원 다섯 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받았다. 이렇게 최근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제로 그려낸 그림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 하나의 예이자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1825)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1825)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 화가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암살당한 마라>, 1793년. 캔버스 유채, 165 ×128.3 cm, 브뤼셀, 벨기에 왕립 박물관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Marat)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다비드는 경찰의 보고서와 같이 실제 현장에 충실하면서도 영웅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꼭 필요하지 않은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코플리의 커다란 전시 효과적 작품에 비교해볼 때 다비드의 그림은 엄숙하게 보인다. 이 그림은 공공복리를 위해 일하다가 순교자의 운명을 맞은 겸허한 인민의 친구 마라를 인상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1828)


프란시스코 고야, <발코니의 사람들>, 1810-15년경. 캔버스에 유채, 194.8x125.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고야엘 그레코(p. 372, 도판 238)와 벨라스케스(p. 407, 도판 264)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훌륭한 전통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위 도판에서 보듯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의 세계에 더 가깝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렇지 않았다.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들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애쿼틴트(a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 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어떤 것들은 고야 자신이 스페인에서 직접 목격했던 우매하고 반동적이며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고야 자신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프란시스코 고야, <거인>, 1818년경. 애쿼틴트, 28.5 ×21 cm,


위 도판은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괴물은 달빛이 비친 풍경 속에 불길한 몽마(夢魔)처럼 도사리고 있다. 고야는 전쟁과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詩)와 같은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전통에서 벗어나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환상을 펼쳐놓을 수 있는 자유!!

덕분에 우리는 시를 보듯 그림을 감상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윌리엄 블레이크, <태고적부터 계신 이>, 1794년, 양각 에칭에 수채, 23.3x16.8 cm, 런던 대영 박물관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 살 아래로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였다.

블레이크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고 이러한 관학 미술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거나 아니면 순진한 기인(奇人)으로 단정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미술을 인정해 주었고 그를 굶어 죽지 않게 해 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를 위해, 또는 자신의 시에 삽화를 그려 인쇄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위 그림은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블레이크는 램버스에 살 때 계단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그의 머리에 떠오른 환상 속에서 컴퍼스로 지구를 재려고 몸을 구부리고 있는 한 이상한 노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나님의 장엄한 환상이다. 이 그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생각나게 한다(p. 312, 도판 200). 블레이크는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친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몽환적이다."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그는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정확한 묘사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백 년 이상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 - J. M. W. 터너(J. M. W. Turner: 1775-1851),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1837)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부각되지 못했었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공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18세기 말엽의 낭만주의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롭게 격상시키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J. M. W. 터너(J. M. W. Turner: 1775-1851)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1837)이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레이놀즈게인즈버러의 초상화를 대조시키는 것과 비견될 수 있다. 그만큼 당대를 주름잡는 대표적 풍경화가 이기 때문이다.


좌: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즈호>, 1838 / 우: <눈보라 속의 증기선>, 1842년, 캔버스에 유채, 91.5×122 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레이놀즈처럼 터너는 그의 작품으로 왕립 아카데미에서 종종 화제를 자아냈던 성공한 화가였다. 그 역시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p. 396, 도판 255)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일생의 야심이었다.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주된 미는 단순함과 고요함에 있었다. 그의 환상 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 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 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그는 자기의 그림을 보다 눈에 띄고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림 속에 모든 효과를 잔뜩 동원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웅대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위 오른쪽 그림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시커먼 선체(船體)와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세한 부분은 살펴볼 겨를이 없다. 그런 부분들은 눈부신 빛과 폭풍의 어두운 그림자에 의해 삼켜져 버렸다..."


터너가 묘사한 자연은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인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부딪치게 되면 자신이 아주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강력한 자연의 힘을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미술가 터너! 그의 그림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놀라운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윌리엄 터너! 그대는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위대한 미술가임을 확실히 인정하는 바입니다!!


좌: 존 컨스터블, <나무 줄기의 습작>, 1821년경. 종이에 유채,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 우: <건초 마차>, 1821년. 캔버스에 유채, 런던 국립 미술관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면서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원했을 뿐이다.


다음은 1802년 그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담겨있던 내용이다.

“꾸밈없는 화가가 자리할 곳은 충분해"

“오늘날의 가장 큰 악덕은 허세야. 그것은 진실을 넘어서려 하지.”


컨스터블은 전통적으로 따라 하는 모든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했다. 그렇다고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연을 스케치하기 위해 야외로 나갔으며 화실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공들여 다듬었다.


위 오른쪽 도판은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컨스터블을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단순한 전원 풍경으로 건초 마차가 개울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림 속에 몰입시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초원 위에 점점이 비치고 있는 햇살들을 살펴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아야 한다. 또한 물줄기를 따라가며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려진 물방앗간 옆을 거닐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그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 화가들이 시도했던 '전통과의 단절'은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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