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어우러진 미술 Academic Art의 태동

23) 이성의 시대 -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by 아이얼

18세기에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크리스토퍼 렌 경 (Sir Christopher Wren : 1632-1723)이었다. 영국은 1666년의 대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당들을 재건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크리스토퍼 렌 경,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1675-1710년.
크리스토퍼 렌 경,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 교회 내부>, 1672년,


좌: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 <런던 치직 저택>, 1725년경


18세기 영국 이상(理想)은 교회나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고전 시대 건축들의 유적을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측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건축가들과 장인들에게 표본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그들의 연구 조사 결과를 교과서로 출판했다. 이 교과서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저술한 것인데,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최고의 권위서로 간주되었다. 자기의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유행의 첨단으로 여겨졌다. 위 사진은 그러한 팔라디오 식 별장인 치직(Chiswick) 저택이다.


이 건물은 정말로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힐데브란트나 가톨릭 유럽의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영국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어디에서나 고전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정면 현관은 코린트 식 기둥 양식을 지닌 고대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벽은 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 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은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이었다.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윌트셔(Wiltshire) 주 스타 우어 헤드(Stourhead)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로랭과 팔라디오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배경에 있는 신전은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18장 도판 참조, 로마의 판테온을 본떠 지은 것)을 연상시키는 한편 연못과 다리, 로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전체적인 경관은 앞 서 말한 바와 같이 클로드 로랭의 회화에서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도시 근교 숲길을 따라 영국식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소설의 배경이 되어주는 영국의 대저택!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근엄한 분위기의 건축물이 연상이 되었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은 듯하다.

영국은 런던의 버킹검 궁전만 잠깐 둘러보았기 때문에 교외 저택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기에 이렇게 책을 통해 짐작만 할 뿐이다.



18세기 영국의 미술가들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신교의 승리로 인한 청교도들의 성상이나 사치에 대한 적대 의식이 영국의 미술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 부문이었는데, 이 마저도 주로 홀바인이나 반 다이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이들은 외국에서 명성을 얻은 뒤에 영국으로 초청된 화가들이었다.


당시 영국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외부의 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택에 걸 그림을 원할 경우 그들은 차라리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그림을 사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대의 자국 화가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미술품 감식가로 자처했으며 또 그들 중 일부는 옛 거장들의 훌륭한 작품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명성 있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귀족들의 모습은 브랜드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인간의 심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윌리엄 호가스의 분노와 고뇌

당시 영국 상류사회 신사들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분노하는 젊은 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호가스 -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생계유지를 위해 책 삽화를 판화로 그리고 있었다.

그는 미술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영국 대중들을 탄식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안목과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까 고뇌하면서 그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를 실행했다. 대중의 관심을 끌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창조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림의 효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영국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미술을 하기 위해서 교훈적 내용을 담은 그림을 그리자고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스스로 스토리텔러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는 방탕과 나태로부터 범죄와 죽음에 이르는〈탕아의 편력(A Rake's Progress)>이나 소년이 고양이를 놀리 는 일에서부터 어른들의 잔인한 살인에까지 이르는 <잔혹의 네 단계(Four Stages of Cruelty)>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가 이러한 교화적(敎化的)인 이야기와 경고의 사례들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이 일련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그림이 의미하는 모든 사건들과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은 일종의 무언극(無言劇)과 같았다. 호가스 자신도 이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극작가나 연출가의 수법에 비교했다. 그는 각 인물의 '성격'을 얼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옷차림이나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연속 그림들은 하나의 이야기나 설교처럼 읽힐 수 있었다. 그러나 호가스는 대중 미술가는 아니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익살스러운 에피소드로 그림을 채우고 또 인간의 유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던 얀 스텐(p. 428, 도판 278)과 같은 네덜란드의 대가들의 회화적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하였다. 지식과 실력으로 무장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의 분석>이라는 미술 이론 책을 저술하기도 하면서 영국인들의 미술관을 깨우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으나...

아쉽게도 영국인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ㅠㅠ



영국 미술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 조슈아 레이놀즈 경


윌리엄 호가스가 18세기 영국 미술을 격상시키는 데 기여한 '선구자'였다면 조슈아 레이놀즈대를 이어 기반을 닦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호가스와의 차이가 있다면 상대인 이탈리아 거장들의 존재를 거부하기 전에 그들의 세계를 알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 상류사회를 이끄는 미술 감식가의 시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에서 그림을 시작했다.

우선은 영국 미술가들이 카라치나 카라바조 같은 거장들의 장점을 연구하고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당시 영향력 있는 미술 비평가들의 견해를 적극 수용했다.


마침내 화가로 성공한 그는 '영국 왕립 미술원'을 창설해서 초대 원장을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아카데믹한 미술이론들을 강연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탈리아 회화의 걸작품들을 연구할 편의를 제공받는다면 미술에 있어서의 올바른 제작 절차를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강연들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주제의 탐구를 권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진정한 화가라면 대상을 세밀하고 예쁘게 묘사해서 인류를 즐겁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의 위대한 신념으로 사람들을 개선시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미술가들의 작업은 '손으로'가 아니라 '머리로' 한다."


"미술가들에게 시적인 착상이 중요하다."


"같은 주제를 그리는 데도 해박한 학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는 미술가들도 시인이나 철학자처럼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술가들이 상류 사회로 진입하는 초석이 되는 사상이었다.


조슈아 레이놀즈,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 1773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조슈아 레이놀즈,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 1775년,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월리스 컬렉션


이번 장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한 자는 바로 이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었다.

그의 포용력과 친화력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를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존경받는 미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행해가면서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지도자였다.

인문학과 어우러진 미술 행위가 되기 위해 미술학도들을 지속적으로 격려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당시 14살 연상의 저명한 지식인 존슨 박사와 친구관계를 맺고 교제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현실을 직시하고 상류사회의 실질적 필요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창조하기 위해 인생을 걸고 열정을 쏟아부었다는 이야기다.

초상화를 그리더라도 당시 초상화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던 반 다이크의 작품을 탐구 모방으로부터 시작하여 플러스알파를 찾아냈다. 모델을 돋보이게 하는 '그 무엇'을 그려내기 위해 상대에게 다가가고 파악했다. 대상의 심리와 성격이 드러난 초상화를 창조하기 위해 기울인 그의 열정적 수고와 노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위 그림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에서 보다시피, 이렇게 친숙함과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된다. 그는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그 매력을 생생하게 전해주려고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재밌게 놀아주면서 친숙해지기 위한 시간을 쏟아부었던 것이었다.


게인즈버러, <하버필드 양의 초상>,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월리스 컬렉션


위 그림은 당시 자신의 라이벌인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 1727-88)가 그린 비슷한 또래의 소녀 초상화다.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고 있는 중인 것 같다. 그러나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레이놀즈의 창안처럼 게인즈버러는 그 단순한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비해 '창안'에 훨씬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다. 서포크 주의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가졌으며 이탈리아에 가서 거장들 의 작품을 연구할 필요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전통의 중요성을 주장한 레이놀즈의 모든 이론들과 작품들에 비교해볼 때 게인즈버러는 거의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라파엘로의 방법을 부활시키려 했던 유식한 안니발레 카라치(p. 390)와 자연 이외는 어떤 스승도 인정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카라바조(p. 392)를 연상시킨다. 여하 간에 레이놀즈는 이와 같은 점에서 게인즈버러를 대가들의 수법을 답습하기를 거부한 천재로 보았으며, 그의 경쟁 상대로서 솜씨를 칭찬하기는 했지만 그의 제자들에게 게인즈버러의 원칙을 따르지는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곰브리치의 이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레이놀즈의 이성적 포용력이었다.


기술적으로는 조금 뒤처질지 몰라도 모델의 매력을 파악하여 드러내 놓는 수고!

관심 주제를 눈으로 본 그대로가 아닌, 시적인 착상을 담아 살짝 비틀어 그려내고자 하는 그의 상상력!

그 참신하고 풍부한 상상력의 뒷받침이 되어준 그의 해박한 학식!


바로 이러한 점들이 이 장의 제목을 '이성의 시대'라고 명명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됨을 확인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미술


18세기 초 프랑스의 미술은 바로크, 로코코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소위 귀족의 시대에서 보통사람의 시대로 향하는 길목이라고 나름 해석해본다.

이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다음의 3명이 소개되었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감사기도>, 1740년경. 캔버스에 유채, 49.5 ×48.5 cm, 파리 루브르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éon Chardin : 1699-1779)은 호가스 보다 두 살 아래인 화가였다. 위 그림은 그의 매력적인 그림 중의 하나로서 한 여인이 식탁 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화폭에 담은 면에서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 작품과 유사하다.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장 앙투안 우동, <볼테르 상>, 1781년, 대리석, 높이 50.8 cm,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로는 조각가인 장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 : 1741-1828)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훌륭한 흉상들은 백여 년 전에 베르니니가 시작했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위 도판은 우동이 제작한 '흉상 볼테르'인데, 우리는 이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을 읽을 수 있다.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자연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picturesque)' 풍경에 대한 취향은 마침내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 1732-1806)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그 또한 상류 사회의 테마를 그리는 바토의 전통을 따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이 풍경화 소묘 작품에서 그의 능란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오직 하나의 붉은색 분필로 이렇게 장엄하게,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풍경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위 작품은 책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별도로 찾아본 작품이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앙투완 바토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과연 '로코코 미술의 마지막 대가'라 명명 지어질 만하다.


자연과 어우러져 그네 타는 우아한 여인을 중심으로 밑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가족들이 이 모두를 지키는 듯한 천사 동상과 절묘하게 조합되어 관중에게 감미로운 행복감을 안겨주고 있다.




갈수록 미술 공부가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도 감당하기 벅차다.

우선 내용의 양이 많다. 더불어 추가로 찾아보고 싶은 그림이나 관련 자료들, 이야깃거리들은 자꾸 쌓여만 간다. 자리에 앉아한 장을 정리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지금도 위키미디어 검색하다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지식욕도 큰 욕망 중 하나라는 걸 뒤늦게 실감하고 있다. 환갑 지난 나이에 뛰어든 이 탐구생활을 어떻게 슬기롭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 중이다.

우선 컴퓨터 사용에 서툴러서 소요되는 시간이 더 많은 듯하다.

적합한 이미지를 찾아내고 다운로드하여서 첨부하는 작업들을 노트북으로 하기 어려워 핸드폰과 병행 작업을 하고 있다. 즉 이미지 검색해 올리는 작업은 핸드폰으로, 텍스트 작업은 노트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혹시라도 이 글을 꼼꼼히 읽으시는 분들~~

손쉬운 방법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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