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그림 앞에 서게 되는 이유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2 - 17~18C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by 아이얼

권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건물과 장식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은 당시 강력한 통치자였던 루이 14세가 누렸던 절대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루이 14세는 "짐이 국가다."라고 자처할 만큼 자신이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평범한 인간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그는 왕권의 화려함과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 왕궁 건설을 계획했다. 당시 이탈리아 건축 조각미술의 거장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빙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만큼 웅대한 뜻을 품고 지어진 궁임을 알 수 있다.


<베르사유 궁>, 파리 부근, 1655-82년, 바로크 양식의 궁전


베르사유궁이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건축가들은 이 건물의 거대한 덩어리를 좌우 날개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고상하고 장엄한 외관을 부여하는 데 주력했다. 주요 층의 중심부를 이오니아식 열주(列柱)로 악센트를 주고 그 열주들이 떠받치고 있는 엔타블레이처 위에는 일렬로 조각상들을 놓았다.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빈의 벨베데레 궁>, 1720-24년<베


남부 독일의 작은 공국(公國)들도 모두 나름대로 그들을 위한 베르사유 궁전을 가지고 싶어 했고, 또 오스트리아나 스페인에 있는 작은 수도원들조차도 그러했다. 당시의 성과 교회당들은 단순히 건물로서만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소도시 전체가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이용되었으며 넓은 시골 들판은 정원으로, 시냇물은 폭포로 변형되었다. 이 엄청난 창작 활동의 결과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의 많은 소도시들의 경관은 완전히 변형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이었다.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 1668-1745)가 말버러 (Marlborough) 공작의 동맹자인 사부아 가(Savoy 家)의 외젠(Eugene) 공을 위해서 빈에 세운 성이다. 이 성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데 분수대와 깎아 다듬은 생울타리가 있는 테라스 정원 위에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힐데브란트는 이 성을 일곱 개 부분으로 구분했으며, 정원 속의 누각(樓閣)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와 요한 딘츤호퍼, <독일 폼머스펠덴 성의 계단> 1713-14년


당시 궁정의 환상적인 바로크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설 때이다.

위 도판은 힐데 브란트가 설계한 독일의 한 성의 계단 부분이다.


"향연이나 연회가 베풀어질 때 등불들이 켜지고, 화려하고 품위 있는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남녀들이 도착해서 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당시의 어둡고 불빛 하나 없으며 불결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거리와 귀족들의 휘황찬란한 거처(居處) 간의 대조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된다." - 451쪽


현실 속 하층 농민들의 궁핍한 삶과 극한 대조를 이루는 화려한 삶...

의도된 사치와 향락을 부추기는 당시의 귀족문화를 엿보게 된다.

경쟁하듯 외양을 치장하고 과시하던 저들 밑에서 신음하던 평민들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진다...


야콥 프란타우어, <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 1702년 / 야콥 프란타우어. 안토니오 베두치. 요제프 뭉겐나스트 <멜크 수도원 예배당 내부> 1738년경


당시 교회의 건물들도 이와 유사한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위 사진은 다뉴브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멜크(Melk) 수도원이다. 다뉴브 강을 타고 내려오다가 둥근 지붕과 이상하게 생긴 두 개의 탑을 이고 언덕 위에서 있는 이 수도원을 볼 때 비현실인 환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수도원은 야콥 프란타우어(Jakob Prandtauer: 1726년 사망)라는 그 지방의 건축가가 지은 것이다. 이 수도원의 장식은 바로크 양식 건축 경험이 많은 솜씨 좋은 떠돌이 이탈리아 장인들이 맡았다고 한다. 이름 없는 떠돌이 미술가들이 단조롭지 않고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기 위해서 건물들을 한데 모으고 배치하는 어려운 기술을 얼마나 잘 습득하고 있었던가! 정말 놀랍기만 하다. 오히려 그들은 당대 유명한 이탈리아 거장 '베르니니'나 '보로미니'보다 더욱 자유분방하게 실내장식을 꾸밀 수 있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순박한 농부가 그의 집을 떠나서 이상한 신비의 나라(멜크 수도원 내부) 들어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을지 상상해보지 않으면 된다. 거기에는 사방에 구름이 가득 있고 음악을 연주하며 천국의 기쁨을 전하는 천사들이 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춤을 추는 것같이 보인다. 심지어 화려한 주제단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물 자체가 즐거운 리듬에 맞추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교회의 건물 안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주기 위한 것이었다." - 452쪽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 1684-1721)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화려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곰브리치는 17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단 한 사람의 거장으로 앙투안 바토를 추천한다. 그는 태어나기 불과 몇 해 전에 프랑스에 점령당한 플랑드르 일부 지역의 출신으로 파리에 정착해 살다가 그곳에서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역시 궁정 사회의 축제와 유흥에 적합한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왕과 귀족들의 성의 실내 장식을 디자인했다. 그러나 실제의 축제가 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앙투완 바토 <공원의 연회> 1719년경, 캔버스에 유채, 127.6x193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앙투완 바토, <사랑의 기쁨>, 1718-1719,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상의 공원에서 즐거운 야유회를 즐기는 꿈같은 생활로 거기에는 비도 오지 않으며 숙녀들은 모두 다 아름답고 그녀들의 연인들은 우아하며, 모든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지 않고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사는 사회, 남녀 목동들의 삶이 마치 미뉴에트 춤의 연속처럼 보이는 그런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미술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바토는 단순히 당대의 유행의 대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예술가였다. 오히려 그의 꿈과 이상이 우리가 로코코라고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한 것이었다. 바토는 품위 있는 호사스러움에 대한 그의 비전을 가지고 우리의 상상력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위 그림은 공원에서의 소풍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에는 얀 스텐의 떠들썩한 쾌활함 대신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고요함이 깃들어있다. 이들 남녀들은 조용히 앉아서 꽃을 만지작거리거나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빛이 그들의 아른거리는 옷 위에서 춤을 추고 있어서 이 잡목 숲의 덤불을 지상의 낙원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바토의 섬세한 필법과 세련된 색조의 조화와 같은 그의 예술적인 자질들은 이러한 복제판을 통해서는 쉽게 맛볼 수 없다. 섬세한 그의 유화 작품이나 소묘 작품들은 원화(原畵)를 보아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바토는 그가 찬양했던 루벤스처럼 슬쩍 한번 그은 분필 자국이나 붓 자국만으로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육체의 인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얀 스텐의 그림과 다르듯이 그의 습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루벤스의 습작과는 다르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바토는 병자였으며 폐병으로 요절했다. 아마도 그를 찬미하고 모방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없었던 그런 강렬함을 그의 예술에서 엿볼 있는 것은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 것이다."




곰브리치는 앙투완 바토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듯하다. 바로크의 환상적 장식의 미를 넘어서는 로코코의 고귀한 우아함을 그려내는 작가의 정신세계! 그를 동경하는 마음이 작품에 대한 서술에 흠뻑 담겨있어서 독자로서 별도의 느낌을 덧붙일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설명대로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환상은 마냥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차림새로 알 수 있는 귀족들의 피크닉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격세지감이 없다. 이렇게 무어라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차분한 느낌!

이렇게 인간의 손끝에서 전해지고 이어지는 '작가의 마음' 이 신비하고 경이롭다.

이 신비함 때문에 자꾸 난 그림 앞에 서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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