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없는 위대한 음악처럼, 주제 없는 위대한 그림

20) 자연의 거울 - 17세기 : 네덜란드

by 아이얼

개신교의 건축


17세기 북부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유럽 가톨릭 국가들을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신교를 믿는 저들이 택한 건축 모델은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수수한 양식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 건축한 대규모 시청사는 그렇게 지어졌다.

야콥 반 캄펜 설계, 암스테르담의 궁전(전에는 시청)>, 1648년. 17세기 네덜란드의 시청


개신교의 회화 - 전문화로 이어지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의 승리가 끼친 미술계의 위기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대부분이 신교로 돌아선 네덜란드에서 화가나 조각가라는 직업군은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교회 제단화나 성화 등에 대한 제작을 대신하여 '초상화 그리기'가 유행되었다. 대부분의 관공서나 개인집에 초상화를 걸어놓는 관습이 생겼고, 당시 화가는 고객의 취향에 맞도록 초상화를 그리면서 수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화가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이렇게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어떤 화가가 전쟁화를 잘 그려 명성을 얻었는지, 달빛 아래의 풍경화는 누가 잘 그리는지, 풍속화나 정물화에서 성공을 거둔 자는 누구인지 대중들은 알아내려 했고, 해당 작업을 맡기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그리는 한 분야만을 전문적으로 더 계속해서 그리는 것이 안전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자기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완벽한 그림을 그려냈다.

예를 들어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은 파도와 구름을 그리는 데만 능숙한 것이 아니라 배와 그에 딸린 장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도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은 아직도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상을 제패하던 시대를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된다.



초상화의 전성기 - 프란스 할스(Frans Hals : 1580?-1666)


프란스 할스,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 1616년. 캔버스에 유채, 175 ×324 cm, 하를렘 프란스 할스 미술관


자유로운 신생 네덜란드에서 출현한 거장인 프란스 할스는 바로 그렇게 초상화를 그리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할스는 루벤스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위 그림은 거의 초창기에 그린 집단 초상화이다. 당시 자랑스럽게 독립한 네덜란드 여러 도시들의 시민들은 대개 가장 부유한 주민들의 지휘 하에 차례로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임무를 할당해 맡은 각 부대들의 장교들을 위해 호사스러운 연회를 베푸는 것이 당시 하를렘시의 관습이었고 이 행복한 순간을 거대한 그림으로 남겨 기념하는 것도 전통이 되었다. 할스는 어떻게 그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를 전달할지와 그와 같이 의례적인 모임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을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 목적에 소홀함이 없이 각각의 인물을 아주 실감 나게 묘사하였다.


잔을 들고 탁자 끝에 앉아 모임을 주재하고 있는 우람한 체격의 연대장으로부터 앉을자리가 없어 서 있으나 마치 자신의 멋진 군복을 뽐내듯이 의기양양해 보이는 맞은편 끝의 젊은 기수에 이르기까지 각 인물들을 다채롭고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획일적인 군복을 입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프란스 할스, 피터 반 덴브루케 초상), 1633년경. 캔버스에 유채, 71.2x61 cm, 런던 켄우드 유증(遺贈)


그는 또한 수많은 개인 초상화들을 그려냈다.

할스와 그의 가족에게는 조그마한 수입밖에 되지 못한 초상화 제작이었지만, 각 인물의 행복한 순간을 찰칵 담아내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가 만일 순간 이동하여 내 곁에 나타난다면 주저 없이 당장! 나의 초상화를 부탁할 것이다.^^



풍경화 - 픽처레스크(picturesque)의 시작


지몬 데 블리헤르(Simon de Vlieger : 1601-53)


지몬 데 블리헤르,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1640-45년경. 41,2x54.8 cm, 런던 국립 미술관


이 그림은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 지몬 데 블리헤르의 작품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이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림을 흥미 있게 만들기 위해 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 1596-1656)


얀 반 호이엔, <강변의 풍차>, 1642년. 목판에 유채, 25.2 34 cm, 런던 국립 미술관


얀 반 호이엔은 헤이그 출신으로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조용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와 달리 간결하고 솔직한 풍경화가 특징이다.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


호이엔은 클로드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신전 대신에 소박한 풍차를, 매혹적인 숲 속의 오솔길 대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자기 고향의 들판을 그렸다. 반 호이엔은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에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시선을 아득히 먼 곳으로 인도하며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야콥 반 로이스달 Jacob van Ruisdael 1628?-82)


야곱 반 로이스,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1885--70년. 캔버스에 유채. 107,5x143 cm, 런던 국립 미술관


앞 장에서 클로드의 작품에 매료된 영국인들이 자기들의 실제 주변 풍경을 변경시켜서 그 화가의 그림에 나오는 정경과 흡사하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클로드의 작품을 연상하게 해주는 풍경이나 정원을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뜻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어지는 네덜란드식 풍경화에도 픽처레스크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이렇게 소박한 풍경 속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이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풍속화 - 얀 스텐(Jan Steen : 1626-79)


얀 스텐,〈세례 잔치>, 1664년. 캔버스에 유채, 88.9x108.6 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이 풍속화를 그린 화가는 얀 반 호이엔의 사위인 얀 스텐이었다.

그 당시의 다른 많은 미술가들처럼 스텐도 그림만 가지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여관을 경영하여 돈을 벌었다. 그는 이 부업을 즐겼던 것 같다. 여관업은 그에게 흥청거리며 노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희극적인 인물 유형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위 그림은 평민들의 유쾌한 생활의 한 장면인 세례를 축하하는 장면이다. 편안한 방한 구석에 아기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가 있고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여 아기를 안고 있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다. 유쾌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유형과 형상들은 볼만한 가치가 충 분히 있다. 그러나 모든 세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화가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화면에 혼합시킨 솜씨가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전경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인물만으로도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 되고 있다. 원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작품의 화려한 색채들이 주는 따사로움과 부드러움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물화 - 윌렘 칼프(Willem Kalf : 1619-93)


윌렘 칼프, <성 세바스티아누스 사수들의 조합의 뿔로 만든 술잔과 바다 가재, 유리잔이 있는 정물>, 1653년경. 캔버스에 유채, 86.4x102.2 cm, 런던 국립 미술관


윌렘 칼프는 빛이 색유리 위에서 어떻게 반사되고 흩어지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또 색채와 질감의 대조와 조화를 연구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와 번쩍이는 도자기, 다채로운 색깔의 과일, 윤이 나는 금속 장식물들을 참신하게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소한 말 몇 마디가 아름다운 노래의 가사가 되듯이 사소한 사물들로도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 -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Jan Vermeer van Delft : 1632-75)


얀 베르메르, <부엌의 하녀〉,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5 × 41 cm,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이러한 전문화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렘브란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얀 베르메르 델프트였다. 베르메르는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일을 하는 화가였던 것 같다. 그는 평생 동안 그렇게 많은 수의 작 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있는 순박한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우유를 따르고 있는 단순한 일을 하고 있는 단 한 여인만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곰브리치는 그것은 바로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베르메르의 이 작품은 단순한 정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참신한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거친 빵조각과 함께 우유를 따르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소박한 정물에서 쉼을 얻게 된다.


가사가 없이도 위대한 음악이 될 수 있듯이, 중요한 주제가 없는 위대한 그림도 있을 수 있다.

17세기 화가들이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모색했던 것은 중요한 주제가 없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래서 동일한 종류의 주제만을 평생 동안 그린 네덜란드의 전문 화가들은 결국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 1606-69)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그리고 아마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레인을 들 수 있다. 그는 프란스 할스나 루벤스보다는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이고 반 다이크나 벨라스케스보다는 일곱 살 아래였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나 뒤러처럼 그가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는 미켈란젤로처럼 후세까지 그의 말이 전해지는 존경받는 천재도 아니었다. 또 당시의 지도적인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던 루벤스처럼 달필의 외교 사절단도 아니었다.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 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파산(破産)의 비애와,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관한 놀라운 기록인 일련의 자화상들을 남겨놓았다. 말하자면 이 자화상들이 일종의 독특한 그의 자서전인 셈이다.


렘브란트는 1606년에 대학 도시 레이덴(Leiden)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해서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 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포기했다. 그 당시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크게 칭찬했다. 그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레이덴을 떠나 상업의 중심지인 번잡한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거기에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해서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수집하면서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 1642년 그의 첫 부인이 사망하면서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 대한 렘브란트의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여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14년 후 그의 채권자들이 그의 집을 팔고 그의 수집품들을 경매에 부쳐서 처분해버렸다. 다만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의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형식적으로 그를 그 회사의 고용인으로 만들었다. 그 덕택으로 그는 만년의 위대한 걸작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충실한 반려자들 또한 그보다 먼저 죽었다. 1669년 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좌) 20대의 자화상 / 우) 에칭기법으로 그린 자화상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5-8년경. 목판에 유채, 49.2 ×41 cm, 빈 미술사 박물관


마지막 자화상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해서 그렸다.



앞서 언급한 할스의 초상화가 실감 나는 스냅사진의 느낌이었다면 이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한 인물의 전 생애를 다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렘브란트의 위대한 초상화들에서 실제 인물과 직접 대면하여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공감을 구하는 그의 절박함과 외로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의 많은 자화상에서 보듯 그 예리하고 침착한 눈은 인간의 마음속을 곧바로 꿰뚫어 보는 것 같다.


렘브란트 반 레인,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상트 페테르부르크, 1642년. 목판에 유채, 73 ×61.5 cm, 에르미타슈 박물관


렘브란트는 성경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을 다수 그렸다. 신앙심이 깊은 신교도였던 렘브란트는 성경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읽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성서의 정신 속에 깊숙이 들어가, 성경 속 이야기들이 벌어지는 상황이 어떠했으며 그런 순간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했을지 머릿속에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림 자체가 설명이 되도록 그려냈다.

이 그림은 다윗 왕이 그의 사악한 아들 압살롬을 용서해주는 장면이다. 렘브란트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성지(聖地)의 왕들과 족장들을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며 번화한 암스테르담의 항구에서 본 동방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윗 왕에게 큰 터번을 쓴 터어키 사람 같은 옷을 입혔고 압살롬에게는 오리엔트의 환도를 차게 하였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못지않게 번쩍이는 질감의 효과를 아주 실감 나게 묘사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의 기본 색은 어둠침침한 갈색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색조들은 몇 안 되는 밝은 색채와의 대조를 보다 강하고 힘차게 돋보이게 만든다. 그 결과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더욱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그것은 한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고조시키고 있다.


렘브란트 반 레인, 〈설교하는 그리스도>. 1652년경. 에칭, 15.5 ×20.7 cm,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역시 위대한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동판화 기법을 에칭(etching, 부식 동판화)이라고 부르는데 그 원리는 대단히 간단하다.

동판의 표면을 힘들여서 긁는 대신에 그 표면을 밀랍(wax)으로 덮고 그 위에 바늘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 바늘로 긁은 자리는 밀랍이 제거되어 동판의 표면이 드러나게 된다. 그다음에 동판을 산성 용액 속에 집어넣으면 밀랍이 벗겨진 부분은 산에 부식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온전하게 남는다. 그런 다음에는 인그레이빙과 동일한 방법으로 인쇄 잉크를 칠한 다음 찍어내면 된다.

그는 이 에칭기법으로 훨씬 더 자유롭고 신속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위 그림은 렘브란트의 에칭 작품 중의 하나인데 이것 역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설교를 하고 있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의 주위에 모여 있다. 이번에는 렘브란트 자신이 살고 있던 도시 주변 유태인 마을에서 모델을 택했다. 이 그림에서 유태인들은 옹기종기 서 있거나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집중하는 모습과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이다.




이렇게 17세기 신교를 받아들이면서 독립했던 신생 국가 네덜란드의 미술을 두루 살펴보았다.

특별히 이번 장에서는 새롭게 개혁을 받아들인 나라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과도기적 고통과 성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격변의 시대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던 당시 미술가들의 애환이 전해지는 듯했다.

현실을 수용하고 감내하면서 상황에 맞게 꿋꿋이 대처한 그들의 모습...


"예나 지금이나 진짜 비극은 명성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데 있다."


곰브리치가 렘브란트를 이야기하며 안타까워했던 이 말이 가슴을 울린다.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부활해 자신들이 남긴 작품들에 대한 후세대의 평가와 가격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심경일까?

시대를 앞서가는 자가 겪어야 할 숙명 이러니 하고 너털웃음을 짓고 말겠지??


새로운 변혁의 뒤안길에서 감내해야 했던 궁핍함...

그 댓가들을 치르고 위대한 미술세계로 도약한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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