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 17세기 전반기 : 카톨릭 교회권의 유럽

by 아이얼

르네상스의 뒤를 이은 양식을 바로크라고 부른다.

바로크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채택한 방법과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양식을 차용해 건물을 짓는 행태에 대해 기존 건축가들이 조롱하듯 비하하며 사용하던 단어였다.


이렇게 폄하해 부르다가 자리 잡은 이름들 바로크, 고딕, 매너리즘...

미술사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명칭들의 유래를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고딕 하면 하늘을 찌르듯 세워진 뾰족뾰족한 첨탑들의 교회가,

바로크 하면 중세 궁정의 화려하고 우아한 건축물과 음악이,

매너리즘 하면 통상적이고 규격화된 이미지들이 떠오를 뿐이었다.


어떤 것들에 대한 이해와 개념이 자리 잡히려면 적어도 그 유래와 이름의 의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 알아내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 그러고 보면 일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려는지 원...


문득 나태주 시인의 유명한 시 '풀꽃'이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곰브리치의 미술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서 이를 절감한다.

그동안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유럽 패키지여행 갔을 때 그저 유명하다고 하니까 따라가서 대충 보고 인증사진 찍고 끝~이었다.

스스로 부끄럽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자세히 본다'는 의미는 '상대를 볼 준비를 갖추었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난 그때 준비가 안되어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었고,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별다른 감동을 얻지 못했던 게다.




바로크 양식 교회 건축 -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1602)


자코모 델라 포르타, <로마의 일 제수 교회>, 1575-7년경. 초기 바로크 교회


유명한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일 제수(Il Gesu) 교회>의 정면이다.

이 건물이 로마에 처음 세워졌던 1575년 당시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양식이었다. 이 교회당은 당시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 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로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에서 건립하였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높고 위풍당당한 원개(圓蓋)를 지닌 십자형이다. 신랑(身廊)인 커다란 장방형의 공간에서는 신도들이 지장 없이 한데 모일 수 있었고, 주제단(主祭壇)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주제단은 이 장방형 공간의 제일 끝에 있으며 그 뒤에는 초기 바실리카의 후진(後陳)과 비슷한 형태의 후진이 있다. 개인적인 기도와 개별적인 성인들에 대한 기도를 위해서 신랑의 양편에는 작은 예배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각 예배실은 독자적인 제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십자형의 팔에 해당되는 양끝 부분에는 두 개의 큰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다.


교회 정면에서 본 외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장엄해 보이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2층 양쪽에 보이는 곡선과 소용돌이무늬 장식이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와서 매너리즘 화가들과 정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사람의 화가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였다. 이들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둘 다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派),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안니발레 카라치, 1599-1600년.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제단화, 캔버스에 유채, 156x149 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위 제단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구세주의 몸 위를 비추는 빛의 묘사와 관람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의 양식과는 아주 다르다. 당시 이런 기법을 바로크적이라고 통칭했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이 제단화 앞에 촛불을 켜놓고 조용히 바라보며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직설적인 고통의 순간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오랜 고통을 감내하고 죽음 당하신 예수님과 성모의 절제된 표정은 아픔을 딛고 거룩한 구원을 이룬 구도자의 자비를 연상케 한다. 죽음 조차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격한 감사를 느꼈을 신도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


카라바조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혹자는 그가 관중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화가이며 아름다움과 전통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핀하기도 했다. 당시 비평가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차한 변명으로 시간을 낭비할 겨를 없이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토마>. 1602-3년경. 캔버스에 유채, 107X146 cm, 포츠담 장수시궁 자선 시설


성 도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세 사람의 사도들이 예수를 쳐다보고 있고 그중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찔러보고 있다. 이러한 파격적 그림이 당시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작품이 매우 불경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름답게 주름이 잡힌 옷을 걸치고 위엄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사도들의 모습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도들이 갖은 풍상을 겪은 얼굴로,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인 일반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카라바조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실제로 노동자들이었으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도마의 이러한 꼴사나운 동작이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적혀 있다!!"

예수가 도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20:27).


이렇듯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는 그의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카라바조는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 세대의 조토와 뒤러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눈 앞에 그려보고 싶어 했다. 그는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표현한 빛은 단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거룩한 빛이었다.



이탈리아로 귀환한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 1600-82)


클로드 로랭,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1662-3년. 캔버스에 유채, 174x220 cm, 케임브리지셔 앵글시 서원.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의 기준을 세운 화가였다. 부유한 영국인들이 자기들의 정원에 로랭이 그린 소자연(自然)을 그대로 꾸며놓으려고 할 정도였다.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정경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1600년 루벤스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스물세 살의 나이로 로마로 가서 그림을 수학했다. 1608년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왔을 당시 그는 붓과 물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모든 대상들을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규모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거침없이 구성할 수 있는 기량을 쌓았던 것이다.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탄했지만 그의 본질적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생동감 넘치게 그리는 것이고,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이 충분히 전달되어 함께 즐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따라 하기'가 아닌 '신념대로 취사선택하여 재창조하기'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대작은 그가 운영하는 공방에서 조직력 있게 생산되었다. 루벤스가 기본 그림을 구성하고 나면 그의 조수들- 문하생들이 밑그림을 그려 기본 채색을 하고, 마지막 자신의 손길로 마무리 지었다.

말하자면 그의 손끝은 '놀라운 신의 한 수'가 되었던 것이다.


페터 파울 루벤스,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1629-30년, 캔버스에 유채, 203.5x298 cm, 런던 국립 미술관


이 그림은 평화의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해서 고전적 우화와 우의적 이야기들이 아주 실감 나게, 박진감 넘치게 표현되고 있다.


지혜와 예술의 여신 미네르바의 보호 아래 결실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평화와 기쁨의 장면이 전개되고 있다. 가운데 평화의 여신은 아이에게 젖을 주려하고 있고,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목신(牧神)은 먹음직한 과실들을 더없이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반대쪽에는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와 풍요의 안식처로 도망 온 세 어린이들에게 한 젊은 수호신이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아래 도판의 세부에서도 보듯이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빛나는 색채 등을 자세히 보게 되면 그의 천재적 필치에 빠져들게 된다. 인물의 표정, 몸짓, 빛의 명암, 색채의 농도 등등...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이 너무도 완벽하다!


위 도판의 세부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 1599-1660)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한 젊은 화가를 만났다. 그는 루벤스의 제자 반 다이크와 동갑내기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였다. 벨라스케스는 그때까지 이탈리아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된 카라바조의 발견들과 그의 수법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 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비야의 물장수>,1619-2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7x81 cm, 런던 앱슬리 하우스웰링턴 박물관


이 그림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한 노인을 그린 것이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도마>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큼직한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 나게 생생히 그려져 있다. 그 물건들의 질감이 손에 닿은 듯 느껴질 정도다. 노인의 깊은 표정과 대조적으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는 소년, 그 뒤 어둠 속에서 덤덤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희미하게 이 둘 사이를 지키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인가 가득가득한 이야기보따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노인과 소년의 뒷이야기가 마구마구 궁금해지는 것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 1659년. 캔버스에 유채, 128,5x99,5 cm, 빈 미술사 박물관


이 그림도 무척 인상적이다. 어린 왕자에게 빠져들 듯하다. 그 어떤 사진이 이렇게 강렬할까? 이런 모습을 과연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찰나의 예술인 사진으로 이러한 깊이와 여운을 얻어내려면 사진가는 수천수만 번의 셔터를 눌러대야 할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이렇게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홀린 듯 멈추어 서서 한참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얽힌 이야기가 생각나는 그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

그림이 주는 신비의 세계이다.




이제 다시 유럽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름을 아는 모든 작품들에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볼 것이다.

도판이 아닌 실물을 보고 느끼는 벅찬 감동을 나의 언어로 담아 기록할 것이다.

다만... 그 감동의 기록이 어찌 미술품 앞에서만이 적힐 수 있겠는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아름다움들!

평소 그것들을 나의 준비된 마음의 카메라에 담아 찰칵찰칵 찍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도 평소 세심히 들여다보기 훈련에서 비롯되고 얻어진다.



** 본문에서 작가나 도판에 대한 설명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근간으로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따로 인용문 표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제 의견은 보라색으로 구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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