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향한 북유럽 작가의 발돋움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by 아이얼

지금까지 공부한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은 다음의 가지로 요약될 있을 것이다.

1.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2. 해부학에 관한 지식

3.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


이러한 이탈리아 미술의 발견은 알프스 이북지역에도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고딕 양식의 건축에 익숙한 그들이 이탈리아처럼 새로운 건축양식을 무작정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건축가들은 르네상스 양식을 고딕 건축의 틀에 조금씩 대입해가면서 '변형된 고딕 양식'을 창안했다.


피에르 소이에, <캉의 성 피에르 성당 성가대석>, 1518-45년. 변형된 고딕 양식

이렇게 궁륭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주두(柱頭)를 달아서 외면상으로만 원주로 변형시키거나 트레이서리로 완성된 고딕식 창문의 뾰족한 아치를 둥근 형태의 아치로 살짝 바꾼 교회들이 있다.


안 발로트와 크리스티안 지크스테니에로스, <브뤼주의 구 관청(재판소 서기과)>, 1535-7년, 북유럽의 르네상스 건물

또한 환상적인 병 모양의 원주들을 지닌 수도원들도 있고, 소탑들과 부벽이 촘촘히 세워져 있지만 고전적인 디테일로 장식된 성들도 있으며, 고전적인 프리즈들과 흉상들로 박공 구조를 이룬 도시의 주택과 건물들이 있다. 위 건물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겉치레로 이탈리아의 양식을 따라가는 모양새가 그리 썩 좋아 보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 담긴 저들의 기지(奇智)는 감탄스럽다.




건축과 달리 회화와 조각에서는 이탈리아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위대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수용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를 알아보기로 하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1471-1528)



알브레히트 뒤러는 미술의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거장들이 발견한 위 3가지 원칙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헝가리에서 이주하여 번창하는 도시 뉘른베르크에 정착했던 유명한 금세공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소묘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찍이 제단화와 목판화 삽화를 제작하는 가장 큰 미하엘 볼게무트 공방에서 수습 기간을 보냈다.


수습기간을 마치고 난 이후, 그는 장인으로서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다.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동판화가인 마르틴 손 가우어(Martin Schongauer)의 공방을 거쳐 스위스 바젤, 뒤이어 북부 이탈리아로 가서 만테냐의 그림을 연구하는 등 자연을 관찰하고 선배 거장들의 작품을 충분히 연구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이러한 그의 행보가 그의 미술가적 안목을 키우는 밑받침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뒤러의 자화상, 21세 모습


뒤러는 남유럽의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술적 능력 이상의 '뛰어난 감정과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고 동판화 작품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뒤러의 작품은 북유럽의 전통인 사물의 세밀한 묘사와 자연스러운 인체 표현 및 조화로운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알브레히트 뒤러.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 1498년, 목판화, 39.2x28.3 cm

(***참고로 이 그림에서 뒤러의 서명을 찾아보시길!)


이 그림은 알프레드 뒤러의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인 요한 계시록을 묘사한 대형 목판화 가운데 하나이다.

용과 싸우는 미가엘을 그린 것으로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한 공포와 불길한 조짐을 강렬하게 시각화했다.


그때 하늘에서는 전쟁이 터졌습니다. 천사 미가엘이 자기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그 용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 용은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지만 당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그들이 발붙일 자리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7~9 내용)


이 위대한 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에서 성 미가엘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주위에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악귀와 같은 괴물과 싸우고 있는데 정말 끔찍스러운 장면이다.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대조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옛 것을 과감히 버려야 새로운 것이 창조될 수 있다."

뒤러는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기법을 창출해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기울였을 고민과 치열한 노력을 엿보게 된다.


<풀밭>, 1503년. 수채화 습작, 종이에 펜, 잉크, 연필과 담채, 40,3x31.1 cm /<산토끼>, 1502년. 종이에 수채와 구아슈, 25x22,5 cm, 빈 알베르티나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해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가장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모사한 작가가 바로 뒤러였다. 위 그림을 보면 그가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를 빼어난 동판화가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완벽한 동판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부에 세부를 더해나가는 치밀한 작업에 한 번도 진력을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예수 탄생), 1504년. 인그레이빙, 18.5 × 12 cm


이 동판화〈예수 탄생>에서 예수님을 비롯한 인물들은 지극히 작게 그려져 있다. 대신 한 허름한 농가의 모습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아기 예수가 누운 곳 바깥에 큰 우물이 있다. 그곳에서 물을 퍼올려 항아리에 채우는 요셉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룩한 상상을 하게 한다.

이 그림에서 그 유명한 <기도하는 손>을 떠올리게 된다.

뒤러의 경건한 영혼이 스며든 그림임에 틀림없다.



또한 뒤러가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한 분야는 바로 그리스 로마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이브>, 1504년. 인그레이빙, 24.8x19.2 cm / <아담과 이브>, 1507년 작품

(** 오른쪽 그림은 3년 후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 제작의 의도와 목적이 다르지만 표현기법과 도구, 재료의 차이를 대조해볼 수 있어 추가로 실어보았다.)


뒤러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일부러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 번째 결과가 바로 이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이다. 이 그림에서 그는 아름다움과 조화에 관한 그의 모든 생각들을 구현하고 자랑스럽게 그의 라틴어 이름으로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 1504년'이라고 서명했다. (왼쪽 그림에서 아담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에 팻말이 있다.)


"그가 컴퍼스와 자를 가지고 그렇게 부지런히 재고 균형을 맞추어서 도달한 조화로운 형태들은 이탈리아나 고전 작품의 모델만큼 신빙성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들의 형태와 자세뿐만 아니라 또한 대칭적인 구도에 있어서도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맨 처음 느낀 이러한 어색함은 뒤러가 다른 미술가들과는 달리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그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그의 에덴동산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생쥐가 고양이 옆에 조용히 누워 있고, 엘크 사슴과 암소, 토끼와 앵무새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숲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 지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뱀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주고 있을 때 아담은 그것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 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유럽 미술의 이상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뒤러의 이러한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북유럽 미술가들의 위상을 높인 뒤러


그러나 뒤러 자신은 스스로 쉽게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동판화를 제작한 다음 해에 그는 견문을 넓히고 남유럽 미술의 비밀에 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처럼 유명한 경쟁자의 방문을 베네치아의 군소 미술가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뒤러는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게는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나에게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함께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네.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은 나의 적이라 할 수 있지. 그들은 교회건 어디건 내 작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것들을 모사하고는 내 작품이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비난을 한다네. 그러나 '조반니 밸리니'는 많은 귀족들 앞에서 나를 높이 평가해 주었네. 그는 내가 그린 작품을 가지고 싶다고 직접 나를 찾아와서 무엇인가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네. 그것도 보수를 두둑히 준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는 대단히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네."


"내가 얼마나 태양을 그리워하며 떨겠는가? 여기서 나는 왕인데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을 것이네"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써 미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막시밀리엥 황제는 야심적인 계획을 세우고 뒤러를 고용했다.

그의 나이 50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실로 제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식탁으로 안내되었을 사람들은 마치 위대한 군주를 맞이하듯이 옆으로 모두 일어섰는데 그들 중에는 지체가 높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모두들 가장 겸손한 태도로 내게 머리를 숙였다."


드디어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위대한 미술가들이 대접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사람이 바로 뒤러였다!





keyword
이전 17화빛의 기적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