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에 맞서는 우리의 모습들

25. 끝없는 변혁 -19세기

by 아이얼

'끝없는 변혁'

제목에서부터 긴장감이 느껴진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난 대전환의 시대.

수공업이 기계공업으로 전환되면서 장인기술의 전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사회에 들어선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모든 양상이 바뀌어가는 이때, 과연 미술은 어떠한 변혁을 치르게 되었을까?


건축


산업혁명은 도시의 발전을 일으켰다.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곳곳에 공장이 세워지고, 일거리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느라 급속도로 팽창하여 '건물로 둘러싸인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나 건축의 붐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건물에 따라 정형화된 건축양식을 따르는 풍조가 일어났다. 건축도 목적과 용도에 따라 구별하여 나름 효율적인 건축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성당은 고딕, 궁이나 관공서는 르네상스, 극장이나 오페라하우스는 과장된 바로크 양식으로 구별하여 효율적인 건축 공정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당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당시 국가 공모를 통해 르네상스 양식 전문가 찰스 배리 경의 설계와 고딕식 세부장식 전문가 퓨진의 협력으로 세워졌다. 두 양식의 적절한 조합으로 위엄 있으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이룬 이 건물은 지금껏 런던 도시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고 있다.



새로운 미술 사조의 탄생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Art)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미술을 정의하고 있다.


"19세기의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


사상 처음으로 미술은 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선택이 없는 곳에는 표현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공한 화가들 -소위 관전파(官展派) 화가들- 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이단자'들 사이의 구별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살아서 버틴 미술가들은 마침내 성공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안타깝게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사라져 갔다. 이렇게 양극화된 미술가들의 변화된 모습에 주목한다. 19세기의 미술사는 결코 돈을 많이 성공한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 미술의 중심지도 변화했다.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작한 르네상스 물결이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에는 파리로 이동했다. 각 국의 미술가들이 파리 몽마르트르의 카페로 몰려들어 서로를 탐색하며 배우고, 미술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였을 것이다.

문득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른다. 물론 영화는 1세기 후인 1920년대의 예술인들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지만 당시의 그런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뒤늦게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두꺼운 벽돌 책을 읽고 있지만 현대로 갈수록 수많은 작가와 작품세계에 대한 탐구가 어렵다. 따라서 오늘은 전체 책 내용을 정리해서 쓰는 것을 포기하고 몇 가지, 맘에 들어오는 것들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인상주의


그동안 유명한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대하면서 그냥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대한 관능적 느낌으로만 이해해왔었구나 이런 자각이 들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도 이런 나의 무지함을 깨닫고 알고 이해하고자 함이다.

그럼 인상주의의 기본 개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에두아르 마네, <롱샹의 경마>, 1865년 경, 석판화

이 마네의 석판화는 얼핏 성의 없어 보인다. 사실적인 세부묘사가 대부분 생략되어있다. 다만 어떤 현장감이 생생히 느껴진다. 지금처럼 현장 취재를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생생한 모습을 알리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전하려는 마음이 전해진다.

마치 기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사실 경마 현장을 본 적도 없고 규칙도 모르지만 상상으로... ㅎㅎ)


"지금 여기는 롱샹의 경마장입니다. 오늘 출전하는 경주마들 관중의 응원 속에 이제 막 출발했습니다. 제일 앞에 달리고 있는 A 뒤로 B와 C가 바짝 쫓고 있습니다. 관중들 자신이 배팅한 말들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생생한 순간 포착을 담는 ! 그것이 인상주의 그림인 것이다.

마네와 뜻을 같이 한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실내 스튜디오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야외작업을 위한 작은 배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므로 그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세부묘사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런 그의 불완전한 마무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혹평을 하기 시작했다.

아래의 <인상 : 해돋이>라는 제목을 부친 모네의 그림을 보고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ts)이라며 조롱했던 것이다.



이전의 고딕이나 바로크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폄하하여 불렀던 명칭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사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한다.


이렇게 새로운 변화는 늘 초기 진통의 과정을 거치는 법인가 보다. 이러한 선구자적인 일을 감내한 위대한 미술가들을 새삼 기리게 된다.


다음은 1876년 인상주의자들의 첫 전시회를 관람하고 쓴 신문 기사 내용이다. 그들이 만일 부활하여(?) 2세기가 흘러간 지금도 여전히 세계에서 앞다투어 전시하고있는 당시 미술가들의 그림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비평가들의 안목이 정답이 아님을 확인한다.


“르펠티에 가는 재앙의 거리가 되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화재 이래로 또 새로운 참사가 벌어졌으니 바로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소위 회화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화랑에 들어갔을 때 내 눈은 끔찍스러운 무엇에 사로잡혀 버렸다. 여자도 끼어 있는 대여섯 명의 정신 질환자가 합세해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하는데, 사람들은 이 그림들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내가 그 그림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들 예술가인 양 하는 작자들은 스스로를 '전위파'니 '인상주의자'니 떠들고 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대강 붓질해서 발라놓고는 거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다. 이런 짓은 베들렘의 정신병자들이 길바닥에서 주운 돌을 다이아몬드라고 우기는 것처럼 웃기는 일이다."


결국에 그들의 작품은 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라고 판명이 났다.



빛과 색채


클로드 모네, <파리의 생 라자르 역>, 1877년, 파리 오르세 박물관


또 하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주목하는 바는 바로 '빛과 색채'이다. 현장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정오의 뙤약볕 아래에서 사물의 윤곽선이 정확히 보일 리가 없다. 색채도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을 그대로 표현한 화가들의 그림은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스케치'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약 다음 그림에서 르누아르가 각 세부까지 세세히 다 그렸다면 얼마나 진부한 그림이 되었을까! 전혀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절묘한 '빛과 색채의 하모니'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림 앞에 서서 저들의 연회를 함께 즐기게 되는 것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파리 오르세 박물관


인상주의자들은 결국 승리하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들은 이해하고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몇 개의 점으로 그려진 것들이 몇 걸음 뒤에서 보면 제 모습을 되찾고 생기를 찾게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실제로 겪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


"이 미술가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자유와 능력에 대한 감회는 실로 가슴 벅찬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조소와 적의를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색조의 아름다운 조합, 색채와 형태들의 흥미로운 구성, 태양과 그늘진 응달의 즐거운 조화 등을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장소에서라도 미술가는 이젤을 세워놓고 그가 받은 인상을 캔버스 위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품위 있는 주제'니 '균형 잡힌 구도'니 '정확한 소묘'니 하는 과거의 낡아빠진 허깨비들은 이제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제 미술가들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 가에 있어 오직 자기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인상주의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돌이켜 볼 때 이 젊은 화가들의 관점이 저항에 부딪쳤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관점들이 너무 금방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사실이 더욱 놀랍다. 비록 그러한 투쟁이 치열해서 관련된 미술가들은 너무 힘겨웠겠지만, 인상주의자들의 승리는 완벽한 것이었다."


모네, 르누아르와 같은 운 좋은 화가는 오랫동안 살아있어서 인상주의 승리를 맛보고 대접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저 '소중한 전설'로 사라져 갔지만...

세상만사 '오래 살고 볼 일'이다. ㅎㅎ



19세기 회화 발전의 두 조력자 - 사진술의 발달 / 일본의 채색 목판화


첫째, 사진술의 발달


요즘은 사진이 예술의 한 분야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인상주의가 추구하는 '자연의 사물들에 대한 순간 포착'의 그림을 사진만큼 훌륭히 담아낼 것이 있을까 싶다. 카메라 기기의 기능에 인간의 안목을 조합하여 창조해내는 '순간의 예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19세기의 사진술은 그동안 회화가 지닌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던 '기록'의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신교도들의 성상 폐기만큼이나 미술가들의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초상화를 미술가들에게 맡기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일본의 채색 목판화의 영향


"당시 일본 미술가들은 동양(중국)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를 포기하고 하층민의 생활장면들을 채색목판화의 주제로서 선택했다.... 이러한 판화들은 물건을 싸는 포장지나 빈 곳을 메우는 종이로 자주 사용되었고, 차(tea) 상점에서 싼 값에 구할 수 있었다... 일본 판화의 거장인 호쿠사이(1760-1806)는 우물의 발판 뒤로 언뜻 보이는 후지산의 정경을 재현했고... 이처럼 유럽 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과감히 무시한 점이 인상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부분들을 다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525-527쪽 내용 중)


다음 그림을 통해 이러한 영향을 받은 에드가 드가의 작품과 비교해보자. 과연 상통하는 바가 느껴진다.


좌: 가쓰시카 호쿠사이, <우물 뒤로 보이는 후지산> 1835년, 목판화 / 우: 에드가 드가, <출연 대기> 1879년, 종이에 파스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특별히 오늘은 삼일절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한 세대 전에 이미 유럽과 교류하고 있었던 일본의 미술가들이었다는 사실! 그것을 확인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때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굳게 문을 닫아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좌: 외젠 들라크루아, <진격하는 아랍 기병대> 1832년 / 우: 장승업(1843-1897), 군마도


문득 궁금해서 당시에 활동했던 조선 후기 화가들을 검색해보았다. 이제껏 서양미술사를 훑어보면서 얻게 된 짧은 지식과 안목으로 비교해봐도 너무도 훌륭한 그림들이었다.

동시대에 그려진 위 두 그림들을 비교해보라!

장승업의 <군마도>에서 느끼는 박진감! 저 말들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오는 듯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송구스러움이 밀려든다.

물론 내가 속한 독서동아리의 프로그램이 서양 역사 위주인지라 본의 아니게 행해진 공부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와 동양의 역사, 문화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 곧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읽기를 마치면 한국미술에 대한 책을 찾아 읽어볼 예정이다.

좌: 장승업의 <삼인문년도> / 우: 신윤복(1758-1814?)의 <단오풍경>


내 젊은 날의 반성, 간절한 바람


아는 만큼 보이는 거고, 알아야 비교 분석하면서 도약발전을 꾀할 수 있다. 나의 젊은 날을 무비판적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대부분 무지함의 소치였다. 모르니까 '무개념'으로 안이하게 살아온 것이다.

이런 신랄한 자아비판은 되도록 젊은 시절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요즘 더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COVID19 때문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비혼족이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사회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태어남과 동시에 신분이 정해지는 지금의 사회구조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갖고 열심히 도전하라고 막연하게 부추길 수 있을까? 1년 만에 집값이 거의 두배로 상승하고 있는 이런 현실에서? 더군다나 코로나 여파로 디지털화는 갑작스레 앞당겨졌고, 이로 인한 계층 간 디지털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근면 성실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넘사벽' 아래서 신음하는 이 시대 청년들의 우울과 자포자기를 어찌해야 하는가! 이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내 자식은 해당사항 없다고 수수방관하면서 목전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 역사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웬 정치와 경제, 교육 문제가 언급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저 안이하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의 나와 주변 꼰대(?)의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 정계 요직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고 계실까? 본인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이며 가슴을 활짝 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심이 들었다...


이제라도 역사의 앞날을 위한 진정성 있는 고민을 하면서 정책을 추구하는 지도자들이 세워져 역사를 선하게 순환시킬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외에도 다루고 싶은 화가들이 많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접기로 한다.

대신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고 그것을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식에 있다.'라고 주장했던 독특한 미국인 화가 제임스 에벗 맥닐 휘슬러(1834-19030)의 작품 몇 점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한다. 이 화가의 유명한 소송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꼭 한번 다루어보고 싶다.^^


좌: 휘슬러,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 / 우: 클로드 모네,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위 그림들은 일본 기모노를 입은 모습을 그린 당시 두 작가의 초상화를 비교하기 위해 올려보았다. 당시 서양화가들이 일본문화에 얼마나 호의적인가를 느끼게 한다.


좌: <푸른색과 은색의 야상곡 : 오래된 배터시 다리>, 1872-5년경. 런던 테이트 갤러리 / 우: <회색과 검정색의 배치,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1871년, 파리 오르세

휘슬러의 그림을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같은 계열의 색채를 조합하여 이처럼 오묘하게 감각적으로 대상을 표현해낼 수 있는 그는 실로 ‘색채의 마법사’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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