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 19세기 후반
19세기 말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대번영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스스로를 비하하며 고립시켰던 예술가들이 다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껏 서양미술사를 훑어보면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즈음해서부터의 미술사는 미술가 즉 미술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전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미술가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삼아 그의 미술을 탐구하며 정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미술사의 주역인 훌륭한 미술가들이 당시에는 상당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
산업 성장으로 누리는 경제적, 물질적 풍요 가운데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지 못해 방황하는 저들의 심리를 헤아려본다.
저들 비탄의 근저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다.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저들이 산업 발전의 역군으로서 추앙받지 못하고 구석으로 밀려나는 마이너리티의 설움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웃 사이더로 밀려난 미술인들 모두가 그렇게 주저앉아 탄식만 하지는 않았다. 저들의 깊은 탄식은 또 다른 도전을 위한 실험적 고뇌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신미술 - 아르 누보(Art Nouveau)'가 시작되었다.
"건축은 그들에게 가장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엄청나게 팽창하는 도시의 구획 구획을 꽉 채운 아파트, 공장, 공공건물들이 그 건물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잡다한 양식으로 세워졌다... 기술자들이 먼저 건물에 적절한 뼈대를 세운 다음 '역사상의 양식들' 중 하나를 골라 건물 정면을 장식하여 약간의 '예술성'을 가미시켰다... 대중은 이를 원했고 건축가들은 그에 부응했다." (535쪽 내용 중)
이렇게 잡다한 양식으로 우후죽순 세워지는 건축물들..
산업혁명의 뒤안길에서 이에 반감을 가진 미술가들이 '아르 누보'의 기치 아래 새로운 종류의 재료와 형태, 장식에 대해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심미주의적이고 장식적인 경향의 미술 운동이 1890년대 즈음 일어났던 것이다.
벨기에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는 일본의 건축 양식에서 좌우대칭의 원칙을 버리고 굽이치는 곡선의 효과를 활용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이 곡선들을 현대의 요구에 잘 맞는 철제 구조물에 옮겨놓았다. 다음의 사진을 보면 건축물 안팎으로 곡선 형태의 세부 장식이 아주 우아하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유럽뿐 아니라 현대 우리 주변의 많은 건물 및 실내 장식품들에서 여전히 활용되고 발견되는 것들이 무수히 많음을 인지하게 된다. 산업화로 하늘길, 바닷길이 열리고 세계가 소통하게 되면서 동, 서양의 교류가 미친 영향력이 잠깐의 혼란과 충돌을 거쳐 이렇게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양식이 지금까지 주욱 이어져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든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인상파 화가들을 이야기했었다. 미술 아카데미에서 배운 고전 양식의 틀을 벗어나 순간의 시각적 인상을 담아내려 했던 그들의 실험이 성공하면서부터 현대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들은 시각적 인상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해내기 위해서 색채의 반사작용을 연구하였고 자유로운 붓놀림의 효과를 실험하였다. 화가의 눈에 띄는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으며, 실제 세계의 모든 측면이 가치 있는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승리는 없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에게도 문제점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거다.
이러한 인상주의 미술의 문제점들을 의식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이 폴 세잔이었다.
그는 마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파 대가들과 같은 세대였다. 초기 청년기에는 저들과 함께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빛과 색채의 표현 화법에 함께 했었다. 그러나... 그는 차츰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 떠들썩거리는 비판 소리에 상관없이 그의 예술의 문제점들을 탐구했다.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 제기한 예술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그가 추구하는 완벽한 예술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푸생의 작품에서 놀라운 균형과 완벽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와 같은 작품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조화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림 전체는 편안하고 고요해 보이는 자연스러운 간결함을 지니고 있다."
곰브리치가 언급한 푸생의 이 그림의 평가가 쉬이 공감되지 않았다. 그래서 푸생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역사적으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대한 화가 세잔이 도대체 왜 푸생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위 푸생의 도판들을 비롯해 많은 작품과 그와 관련한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푸생의 그림에 담겨있는 정신과 영혼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다.
세잔은 이와 같이 웅대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지닌 미술을 자신의 예술적 목표로 삼았다.
푸생의 균형과 조화미에 인상파의 색채와 입체감을 덧입혀, 새롭게 바라본 자연과 사물의 인상적인 모습을 자신만의 형태와 색채로 담아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을 본떠서’ 그림을 그리고, 인상주의 대가들이 발견한 것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푸생의 미술을 돋보이게 하는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렇게 온 생애를 바쳐 투혼 한 세잔의 굳은 의지와 열정이 놀랍다. 비록 당시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자연에서 용기를 얻어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했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 그는 화상(그림 판매자)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저는 약간의 진경(참 풍경)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입증할 것입니다.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아~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무래도 세잔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한번 정리해야겠다. 2년 전 액상 프로방스의 그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도 생생하고,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친구 에밀 졸라와 관계된 그의 인생 이야기, 그를 담은 영화 등등 세세히 찾아보며 그의 영혼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 한가득이다.
#바로 위 도판 왼쪽은 피카소의 뮤즈였던 세잔의 그림과 비교를 위해 올려보았다. #오른쪽은 졸라와 세잔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스터이다.
이 도판은 점묘법(pointillism)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 1859-91)의 그림 <크르브부아의 다리>이다.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의 기법을 출발점으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탐구하였고, 순수 원색을 분할하여 규칙적인 점으로 찍어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는 당대 함께 활동했던 카미유 피사로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두 화가 모두 당시에 별로 인정받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었다고 한다.
#피사로와 연관된 쇠라의 이야기는 브런치 작가 @양양님의 최근 게시글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를 참고해 읽으면 좋을 듯하여 뒤에 따로 링크를 걸어놓도록 한다.
1888년 겨울, 쇠라가 파리에서 주목을 끌고 있고 세잔은 엑상 프로방스에 은거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 젊고 성실한 한 네덜란드 화가가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왔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다.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밀레의 작품과 거기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큰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상(畵商)의 상점에서 일하던 그의 동생 테오(Theo)가 그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의 동생은 항상 형 빈센트를 성심껏 도와주었고 남프랑스의 아를(Arles)로 가는 여비까지 마련해주었다. 빈센트는 언젠가는 그림을 팔아 너그러운 아우의 은혜를 갚을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를에 머물며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빈센트는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일기처럼 매일 계속되는 편지에는 그의 모든 생각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명성을 얻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독학의 초라한 화가가 쓴 이 편지들은 문학 작품으로서도 감동적인 가치가 있다. 그 편지들에서 우리는 반 고흐의 화가로서의 사명감, 그의 투쟁과 승리, 절망적인 고독, 동료애에 대한 간절한 열망 등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불 같은 정열로 작품을 제작했던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게 된다. 아를에서의 방황 끝에 그의 정신이 쇠약해져 정신병자 수용소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런 중에서도 평정을 찾았을 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1890년 7월 스스로 생명을 끊었을 때 그의 나이는 37세였고, 화가가 된 지 10년이 채 못되었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대부분 이 마지막 3년 안에 그려진 것들이다." (544~546쪽)
"그는 돈 많은 감식가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세련된 예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
그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동과 붓놀림은 아주 유명하다. 극한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광기 어린 작품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고흐는 정확한 묘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이 그린 사물들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였으며, 자연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만 들어맞으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변화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흐의 일대기와 작품들에 관해서는 워낙 세간에 잘 알려져 있기에 특별한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이 두 화가는 다 같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의미가 깊다.
물론 그 이유는 각각 달랐다.
세잔은 정물을 그릴 때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고 자신의 특수한 실험에 필요할 때에만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다.
반면에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형태를 왜곡시켰다.
"두 사람 모두 예부터 내려오는 미술의 규범을 타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혁명가'인 체하지도 않았고 자기만족에 빠진 비평가에게 충격을 주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작품에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 만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했을 뿐이다."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제3의 화가가 1888년 남프랑스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폴 고갱(Paul Gauguin)이었다. 그와 친하게 되길 무척 갈망하고 있던 고흐는 영국의 라파엘 전파(前派)가 지녔던 화가들 간의 우정을 꿈꾸면서 자신보다 다섯 살 위인 고갱을 설득하여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인간적으로 고갱은 고흐와 아주 달랐다. 그는 고흐가 지닌 겸손함이나 사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화가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화가로서는 비교적 늦게 출발했고(고갱은 이전에 유능한 주식 중매인이었다), 거의 혼자서 그림 공부를 했다.
두 화가의 우정은 결국 불행하게 끝을 맺었다. 발작적인 정신 착란을 일으킨 고흐가 고갱에게 달려들었고 고갱은 그 길로 파리로 도망쳤다. 세잔과 에밀 졸라와의 30년 우정이 깨진 사연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숙명 같은 고독한 인생이 안타까울 뿐이다...
고흐와 헤어진 고갱은 소박한 삶을 찾아 '남양 군도'의 하나인 타히티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야만인(barbarian)으로 살아가며 자연의 아이들을 그렸다.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자연의 아이들이 지닌 순수한 강렬함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미술에서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룩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쏟아부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이 유럽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남양군도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마지막 고독과 절망의 몇 해를 보내다 질병과 궁핍으로 쓰러져갔다.
이렇게 아르누보의 건축물과 3명의 신인상파 화가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무언가 중요한 것이 미술에서 사라져 감을 느꼈고, 그것을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세잔은 순간순간의 감각에 집착한 나머지 잃어버린 균형과 질서를 되찾기 위해,
+ 고흐는 시각적 인상 탐구에 밀려난 미술가의 강렬한 정열을 회복하기 위해,
+ 고갱은 인생과 예술 전반에 대한 철저한 불만을 해소하고 대치할 그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제각기 길을 찾고 방법을 모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세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 세잔의 해결 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를 일으켰고,
=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다.
= 고갱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그림으로 자신의 지식과 사상, 감정을 그려내는 저들의 의지가 열정과 만났을 때! 그들은 세상을 얻는 환희를 맛보았을 것이다.
미술은 공부할수록 매력적인 분야다. 뒤늦게 늦깎이 학생이 되어 미술사 책을 읽으며 탐구하고 있기에 더욱 감동이 밀려드는 것 같다. 저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내내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작품을 보고 또 보았다.
당시의 '아웃사이더'들이 시, 공간을 넘나드는
매혹적 '인사이더' 되어 한 여인의 가슴을 흔들어대고 있다.
#피사로와 쇠라에 관한 참고글 링크
https://brunch.co.kr/@hyojooyang/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