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물과 안 친하다. 처음보는 개나 고양이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가서 교감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우리 남편도 그랬다. 옆반 선생님도 그랬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럽고 좋다. 하지만 나는 안 그렇다.
나는 식물과도 영 안 친했다. 예뻐서 집에 데려오면 끝내는 죽이는 일이 많았다. 죄짓고 싶지 않아서 그 다음부턴 안 들이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 중엔 간간히 예쁘다고 들이곤 또 죽이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살면서 느끼기에, 나에게 애정의 대상은 인간으로 한정된 느낌이 있었다. 그게 못내 아쉬워 동식물과 가까운 사람들을 부러워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굳이 그런 나를 깨고 싶은 생각도 딱히 없었다. 사람에게 애정의 총량이 있다면 나는 다른 데 나누지 않고 그 애정을 사람에게 몰빵하겠다는 이상한 의지도 있었던 것 같다.
원격 수업이 시작된 올해 초, 아이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학기가 시작된 상황이 너무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우리 교실에 다른 일로 찾아온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아이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고 싶고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는데 사실은 내가 아이들에게 뿌리 내리고 있었나보다고, 아이들이 없으니 내가 너무 흔들린다고 말하고는 울어버렸다. 그 선생님이 나에게 동물이나 식물을 키우느냐고 물었다. 키워봤으면 좋겠다고. 사람 말고 애정을 쏟을 다른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잊혀졌다. 그 말 때문에 시작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우리 집에 식물을 다시 들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들인 것이 제법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꽤 오랫동안 키웠다. 다시 들이기 시작할 때도 가장 큰 이유는 예뻐서였다. 또는 우리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어서. 집 꾸미기에 관심 많은 나에게 식물은 그저 '플랜테리어'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다만 키우는 스킬이 좀 늘었던 걸까.
되돌아보면, 바쁜 중에도 식물들을 자주 관찰했다. 말랐다 싶으면 물을 줬고 녹빛이 연해지는 것 같으면 창가로 내다주었다. 날이 적당하다 싶으면 베란다 선반에 문을 열고 내다놓았다. 별 것 아닌 그 일들을 나름의 정성으로 쳐주었던 걸까. 식물들이 고맙게도 잘 자라주었다.
일 년이면 열 두 번은 가구를 옮기는 나에겐 가구 배치를 새로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한 일은, 식물들을 한 데 모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베란다 창 앞에 가져다 둔 일이었다. 식물들에게 가구 하나를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내가 아닌 식물을 중심에 두고 가장 적당한 장소를 찾은 일. 식물들의 새 자리는 햇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잘 들고 식물들을 한 데 두고 관찰하기도 좋은 그런 곳이었다.
가구 재배치를 마치고 쇼파에 앉아 쉬자니, 나도 모르는 사이 중심성이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나 보기 좋은 곳에 마치 옷을 고르듯 적당한 식물을 배치하던 내가, 식물을 중심으로 그 아이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에 자리를 내어주기까지 내 안에선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그 시간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엮여 일어난 건지도 모를 그 사건들 모두가 사실은 나를 일으키고 다시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식물에는 그런 힘이 있나보다. 사람을 위로하고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힘. 내가 사니 당신도 살라고 토닥이는 힘. 오늘 나를 살게 해 준 당신은 고맙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지지해주는 힘.
그 힘이 나를, 그리고 우리 집을 오늘도 따스히 만져준다. 고맙다.
2020.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