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굴레
친구들과 모일 때마다 누가 밥을 사고 커피를 사고 서로 눈치 보는 게 불편해서 한 달에 딱 만 원씩을 모으기로 했다. 셋이니 한 달에 딱 3만원이 모아졌는데 만나는 횟수가 적으니 금세 꽤 큰 돈이 되었다. 어쩌다 만나도 적당히 한 끼 식사하고 카페 가는 게 다인데 그 돈을 다 쓸리 만무해서 모아진 돈으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한참 유행처럼 번지던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보기로 했다.
화장을 하지 말고 맨 얼굴로 오라고 했다. 올 때는 평소 사용하는 색조 화장품을 모두 들고 오라고. 출근할 때도 피부 화장하고 눈썹과 입술 칠하는 게 다인지라 딱히 색조랄 것도 없었다. 쓰던 쿠션 하나에 선물 받아 사용 중이던 립스틱 4개를 챙겼다. 화장을 안한 채로 옷을 차려입기엔 좀 어색해서 동네 마트 갈 때나 입던 검은 원피스를 입고 모자를 쓴 채 집을 나섰다.
주택을 개조한 것 같은 곳이었다. 작은 마당이 딸려있었다. 소담한 규모가 마음에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색색의 옷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먼저 오늘 일정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가져온 화장품을 꺼냈다. 오늘 진단이 모두 끝나면 가져온 화장품 중 어울리는 색과 아닌 색을 분류해주신다고 했다. 덧붙여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장품도 추천해주실 거라고 했다. 시작도 전에 한껏 기대가 됐다.
우리는 한 사람씩 의자에 앉아서 퍼스털 컬러 진단을 받았다.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천을 얼굴 근처에 대고 얼굴의 혈색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했다. 어떤 색은 둔감한 내가 보아도 느껴졌지만 미세한 변화는 잘 분별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은 전문가의 판단에 맡겼다.
두둥.
꽤 긴 시간 동안 이 색 저 색을 대보고 나서 우리는 각자의 퍼스널 컬러를 알게 되었다. 나는 가을 뮤트. 입고 갔던 검정 원피스는 'bad'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그길로 곧장 옷장 정리를 했다. 나와 맞지 않는 색의 옷은 나눔하거나 비웠다. 다행스럽게도 원래 베이지색을 좋아해서 옷장 속 대부분의 옷이 내 퍼스널컬러와 맞았다.
그 날 이후 매일 옷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퍼스널 컬러와 맞지 않아도 너무 아끼던 옷 몇 가지는 옷장에 그대로 걸려있었지만,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진한 베이지, 연한 베이지, 보통 베이지 사이를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새 옷을 살 때도 고민이 짧았다. 첫째,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고, 둘째, 그 중 베이지색을 사면 그만이었다.
이토록 효과적이고 효율적일 수가 없는 일상을 보내다 어느 날 문득 벼락같이 내가 낯설어졌다. 쨍한 색 옷으로 기분 전환 한 번 하고 싶어도 내 퍼스널 컬러를 안 이상 차마 그럴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때때로 나를 상상의 세계로 초대하던 초록색 원피스를 버린 게 애석해졌다. 나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색의 옷을 입는 게 그토록 용서할 수 없는 일인가. 나는 나를 바라볼 사람을 위해서 옷을 입는가.
아니. 아는 건 아는 거고 고맙긴 한데, 그래도 주체적으로 입기로 했다. 반항하는 마음으로 검정 가죽 자켓을 하나 장만했다. 올 여름엔 초록이나 노랑이 쨍한 원피스도 하나 사볼테다. 물론 베이지색 옷을 더 자주 입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