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탐색해야 하는
내가 하는 생각, 말, 행동에 확신이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요즘 모든 것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정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다. 매일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고, 때론 매일 같은 선택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매번 선택을 할 때마다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닥치는 대로,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결정을 하다 보니 후회하는 일이 곧잘 생긴다. 어떤 일 앞에서든 확고한 생각이 있다면 후회를 덜 하게 될 텐데. 어쩐지 나는 해가 갈수록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내 주변과 상황은 시시때때로 변하고 그에 따른 내 생각도 주춤거리긴 하지만 변한다. 늘 어떤 경험(독서도 포함해서)을 할 때마다 내가 알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얕은지 깜짝 놀라곤 하는데 그보다 깜짝 놀라는 지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더 놀라곤 한다. 너무 한 가지 생각에만 정답을 못 박아두고 평생을 변치 않는 것도 문제가 되겠다 싶었지만, 나처럼 이리저리 바뀌는 것도 별로지 않나 싶어 속상했다. 이 속상함이 극에 달해 격렬한 자기비판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봄이가 태어나고 난 후부터이다. 한 생명을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데. 이 아이가 자라며 내 생각과 언행에 많은 영향을 받을 텐데. 이렇게 갈대같이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여도 될까? 육아에 정답은 없다는 데에 위안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다.
내 아이는 안 그럴 줄 알았지. 집에서 깨무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어린이집에 가서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더 아기일 때는 우는 일이 거의 없어 걱정까지 하게 한 아이였다. 자기표현을 안 하는 아이일까 봐. 속상하고 울고 싶은데 꾹 참는 아이일까 봐. 점차 본인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원하는 것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자기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을 쓸었던지. 주위 사람들의 이렇게 얌전한 아이가 어디 있냐며, 정말 손이 안 가는 아이라는 말을 들어도 긍정보다는 콧방귀를 뀔 수 있을 정도의, 떼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나와 남편을 물기 시작했다. 이제 막 어린이집에 보내게 된 시점이어서 걱정을 했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무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한동안 듣지 못해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봄이는 친구나 언니, 오빠를 종종 깨물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전에는 적응하기에도 바빠 무는 행동까지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울거나 성질을 내는 정도였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과 공간에 대한 적응도 끝났겠다 행동하기가 편해지니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친구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로 전달받고 나니 당혹스러웠다. 마음을 놓고 있었던 터라 갑자기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나며 이런 일을 종종 보고 해결을 해왔는데 막상 내가 이런 상황에 닥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생님. 어떻게 하죠? 상대 부모님께 전화라도 드릴까요?”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어린이집 선생님은 자신이 상대 부모님께 잘 말씀드렸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다독여주셨다. 이 말을 듣고 안심은 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봄이가 더는 다른 사람을 물지 않도록 어떻게 훈육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이의 팔을 내가 직접 물어 이게 얼마나 아픈 건지 알려줄 수도 없고, 친구가 앞에 없으니 친구 물지 말란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고.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강하게 훈육을 할 수도 없고. 머릿속에 온갖 훈육법은 맴도는데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아이가 내 말을 얼마나 이해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사람을 물면 안 된다고, 내가 내 팔을 물어 보이며 얘기해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봄이는 세 번 더 친구와 오빠를 물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으니. 아이는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줄 알게 되면서 자기주장도 강해지고 떼도 늘기 시작했다. 그것이 위험한 일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웬만한 건 다 수용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디까지 수용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육아에 정답이 없다는 말에 안도하던 내가 육아 지침서라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말을 할 땐 이렇게 반응하고, 저런 행동을 할 땐 이렇게 대응하라는 지침서. A4용지 한 장으로 정리된 육아 지침서가 있다면 냉장고에 잘 붙여두고 오며 가며 잘 읽고 숙지하여 익숙해질 때까지 적용해 볼 수 있을 텐데. 봄이가 하는 언행에 대해 적절한 피드백을 줄 수 있을 텐데. 어떤 반응을 주는 것이 옳은지 고민하다 못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텐데.
결국, 이렇게 육아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안해질 때면 어쩔 수 없이(?) 또 책을 찾게 된다. 어차피 육아에 정답은 없으니 나와 결이 맞는 육아서 몇 권만 읽고 실천하자고 다짐했던 과거의 내 모습은 훌렁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 잔뜩 쓰여 있는 육아서를 이것저것 사들이고야 만다. 어차피 나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면서도. 봤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을 또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정작 아이와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잊어버리고 마는 걸 경험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지금 하는 고민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나 혼자 하는 생각보다는 좀 더 지혜로운 생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찾게 된다.
그렇게 육아서를 몇 권 읽다 보면 일면 자신감이 생기면서도 어쩐지 아쉽기도 하다. 결국, 육아서를 잠시 내려놓고 다른 종류의 책을 찾게 된다. 초점을 아이나 다른 이가 아닌 내게 두기 위함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목적을 앞세우기보다 나를 잘 키우기 위해 읽으려는 셈이다. 나를 잘 키우려 노력하는 것이 아이를 잘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른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권의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나름의 해답(답은 구하고자 하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가르침과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다른 이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과 규율에 따라서만 사는 사람들을 ‘바람에 나부껴 공중에서 이리저리 빙빙 돌며 흩날리다가 나풀거리며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 같은 존재’라고 일컬은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데 필요한 건 신념이 아니라, 비행을 이해하는 것’이라며,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자신의 이해력으로 보고, 이미 아는 것을 찾아내라’고 말해주던 『갈매기의 꿈』을 읽으며.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하라’ 던, ‘어머니가 아이 안에 깃들어 있듯이 그대들의 자기가 그대들의 행동 속에 깃들게 하라’ 던, ‘정신은 스스로 삶을 깊이 파고드는 삶’이라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결국, 내가 경험하는 세계 속에서 사유하며, 내면을 살피면서 스스로 철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가 자신에게 꼭 맞는 답을 구했다고 그것이 내게도 정답이라 여기며 허둥지둥 뒤따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단지 내 주위에 흩뿌려진 것을 관찰하고, 현상에 대해 사유하고, 확신보다는 의문을 가지며 행동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되고 내가 사유해야 할 세계의 범위는 넓어졌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내게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나와 내가 속한 세계를 인식하게 한다. 아마도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내내 확신을 갖지 못해 실망할 것이고, 확신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고, 얼마간은 확신에 차 있다가 또다시 실망하는 시간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나를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나 또한, 성장할 것임을 믿는다. 정답이 없는 세계 속에서 사유의 지평이 넓어지기를. 이를 바라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