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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샘하는 잎샘추위일까.

꽃이 피기 전, 꽃샘추위일까. 잎샘추위일까.

by 연하일휘 Mar 18. 2025

회색빛 콘크리트 위로 하얀 알갱이들이 쏟아져 있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한차례 구석으로 휩쓸려가다, 천천히 녹아내린다. 3월 중순에 내리는 눈, 완연한 봄기운의 한가운데라 생각했건만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가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금세 녹아내린 눈이 땅을 적신다. 얼어붙을 도로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봄볕의 따사로움이 스며드는 까닭이다. 겨울의 문턱을 건너며 햇빛만은 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꽃샘추위라 일컫고 싶지만, 아직 꽃이 피어나지 않았다. 연녹빛 새싹들이 고개를 내미는, 싱그러움을 시샘하며 찾아온 잎샘추위려나. 하지만 아직 잎들조차 제 모습을 다 뽐내지 않은 시기이건만. 무엇을 시샘하려 찾아온 추위일까. 어둠이 나직이 내려앉은 밤, 아빠와 재잘거리는 조카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병원으로 향한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도, 이내 뜨고 마는, 하얀 여동생의 얼굴이 안쓰럽다. 출산 전보다도 더 부어있는 손등에는 붉은 관을 통해 방울방울 떨어지는 혈액들이 스며든다. 응급 수술로 출산을 하며 출혈이 많았던 탓에 수혈을 받는 중이다. 아직 엄마아빠의 손길이 필요한 조카를 돌보기 위해 제부와 교대해 동생의 병실에 자리를 잡는다.


오랜만에 밤새 자매의 대화가 이어진다. 잠을 좀 이루면 좋으련만, 호르몬 탓에 깊은 잠을 오래 이루지 못한다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가도 이내 깨어난다. 새벽 내내 상태를 살피기 위한 간호사들의 방문, 그리고 고통들에 고른 숨소리가 흩어진다. 


"첫째 때보다 더 아파."


자궁이 수축할 때마다의 통증, 훗배앓이에 여동생은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헛웃음을 터트린다. 너무 아프니까 웃음이 나- 초산부보다 경산부가 훗배앓이를 더 심하게 앓는다 했던가. 둘째를 임신하며 약해진 몸도 한몫을 하는 듯해 안쓰럽다. 첫 출산은 임신중독증이 오기 직전에, 일주일정도를 앞당겼었다. 그때의 영향인 것일까, 둘째는 임신중독증이 조금 더 이르게 찾아왔다. 임신중독증까지 가지 않으려 병원을 다니며 관리를 했었지만, 출산일을 일주일 앞두고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었다.


첫째보다도 작게 태어난, 이르게 태어난 아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여동생은 안심하며 잠이 들었다 한다. 제 몸이 아픈 그 순간에도, 혹여 아이의 폐가 미성숙하진 않을까, 그 걱정스러움에 잠드는 것을 늦춰달라 한 부탁 덕분이다.


바깥의 찬 공기가 거센 바람이 되어 창을 두드린다.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지만, 산모가 머무는 방은 땀방울이 살짝 맺힐 정도로 따스하다. 수술 중 잠들기 전, 잠깐 마주했을 때 외에는 아가 얼굴을 보지 못한 여동생은 제부가 찍어 준 사진을 바라보다 첫째에 대해 물어본다. 베이비캠을 보려 하다가도, 통증이 심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내 몸이 너무 아픈데, 첫째 걱정까지 더해지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는 말에 작은 울컥임이 솟아난다.


Pixabay


조금 이르게 태어난 조카의 얼굴을 몇 장 안 되는 사진들로 요리조리 가늠한다. 여기는 엄마 닮았고, 여기는 제 오빠 닮았고. 왜 둘째는 아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건지, 딸이라서 그런가. 제 엄마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어여쁜 제 엄마를 닮아, 갓 태어난 그 조그만 얼굴이 어여쁘다.


아직 파란 잎들이 채 나오지 않은, 희미한 꽃들의 흔적이 서서히 짙어지는 봄,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을 움츠린다. 추위 속에서도 할머니들은 두꺼운 유리창 앞에서 손녀를 보며 밝게 웃는다. 병원을 나서며 찬 바람에 옷을 여미면서도, 내리사랑에 푹 빠져든다. 무엇을 시샘하려 찾아왔나 싶더니만, 어여쁜 생명을 시샘하러 찾아왔나 보다. 짙은 사랑의 내음을 시샘하는 추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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