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변훈련을 할 시기, 벌써 이렇게 커버렸네.
하얀 바탕에 그어진 분홍색 선 사이마다 작은 그림과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부어올랐던 몸의 부기가 빠지고, 혈색이 좋아진 여동생이 입은 입원복은 꽤 산뜻한 느낌이다. 아가들이 있는 공간이라서 그런 걸까. 잠깐 둘째의 얼굴을 볼 겸, 미리 병원에 와 있던 제부도 함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첫째가 생각보다 의젓해. 아빠 없다고 많이 울까 걱정했는데."
산부인과의 모자동실 시간과 제부가 첫째를 돌봐야 하는 시간이 겹쳤다. 둘째 얼굴도 눈앞에 아른거릴 제부를 위해 저녁 수업이 없는 날마다 대신 조카를 돌봐주는 중이다. 평소라면 아빠가 저 혼자 두고 나간다고 대성통곡을 했었는데, 갑작스레 의젓해졌다. 엄마를 찾지도 않고, 나간 아빠에 대한 섭섭함에 울지도 않고. 대신 할머니와 이모 품에 안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가족들 그 누구도 '동생'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건만, 아가의 본능인 건지. 오빠가 되면서 며칠새 훌쩍 커버렸다.
"근데 아기 엉덩이 대체 어떻게 씻겨? 다리 딱 모으고 서 있던데."
"원래 그래. 다리 툭툭 치면 다리 벌리거나 올리니까 번갈아 씻어주면 돼."
여동생과 함께 조카를 돌볼 땐, 딱히 기저귀를 갈 일이 없었다. 팬티형 기저귀로 바뀌면서 어려울 일이 없다 보니, 대신 조카를 돌보면서도 별다른 조언이 덧붙지도 않았다.
조카를 품에 안고 함께 놀아주다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올라온다. 기저귀를 슬쩍 들춰 보았을 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아가가 방귀라도 뀐 건가. 그런데 계속 풍기는 냄새에 다시 안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제야 저 기저귀 안쪽으로 빼꼼, 응가가 보인다. 우리 아가는 응가도 잘하네- 아이구, 예뻐라- 조카를 안아 들고 둥기둥기 칭찬을 해 주며 욕실로 향한다.
아가를 샤워핸들에 세우고, 기저귀도 무사히 빼고, 따스한 물도 틀었다. 문제는 조카가 다리를 딱 모으고 서서는 도무지 벌리지를 않는다. 다리에 힘 좀 빼자- 다리를 툭툭 건들고, 말로 달래고, 샤워기 물줄기로 간질간질- 간질여봐도, 두 다리를 딱 붙인 채 발로만 작게 물장구를 쳐댄다.
어찌어찌 그 상태로 씻어 내리기는 하지만 영 찜찜하다. 거실로 데려와 물티슈로 한 번 더 닦아내려는데, 군데군데 응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시 안아 들고 돌아간 욕실, 조카는 여전히 두 다리를 딱 붙이고 서서는 다리 사이를 씻기는 일을 허락해주질 않는다. 결국 안아 들고 씻기느라 이모 바지가 축축이 젖었건만, 그것마저 재밌는지 조카는 젖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한껏 높은 웃음을 터트린다.
"다리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엉덩이 근육이 드러나더라. 이렇게 일직선으로 한 줄씩."
손동작까지 더해가며 조카의 엉덩이 근육 모양을 설명하니 여동생과 제부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건 진짜 직접 봐야 해. 그 작은 엉덩이에 힘을 얼마나 줬는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요즘 또 쑥 크려는지 포동포동 살이 올랐건만, 그 통통한 엉덩이에도 이리 탄탄한 근육이 숨어있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두 번째 씻길 때도, 두 줄로 선이 선명한 게. 그 쪼그만 게 무슨 근육이 그리 탄탄하대니."
"이모가 씻겨주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가, 슬슬 배변훈련 시작할 때가 되어가나 봐."
평소 엄마와 아빠 앞에서와는 다른 모습이 꽤 신기한 듯, 여동생과 제부의 대화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아기 변기를 사기는 했지만, '앉아보자'라는 말에는 절대 앉지 않는. 그러다 문득 장난하며 놀고 싶을 때, 그제야 한 번쯤 않고 있어 배변 훈련은 천천히 생각하고 있었단다.
며칠 사이, 조카가 훌쩍 커 버렸다. 새로 익힌 단어들의 수가 어마어마한 것은 물론. 어른들이 하는 말들 중 단어들만 따라 하다 요즘에는 짧은 문장까지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숟가락질이 꽤 정확해진 데다, 장난감을 장난하면서도 손끝이 야무져진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생을 엄마가 품고 있을 땐, 질투의 대왕이 되어 한껏 어리광을 부리더니만. 오빠가 된 덕분일까. 갑자기 성큼 커 버린 조카의 모습이 아쉽다. 의젓하게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 아이들은 금방 큰다고는 하지만, 채 눈에 다 담지 못한 그 모습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이모바라기 조카와 조카집착 이모가 되어버린 요즘. 천천히 크길 바라는 것은 이모의 너무 큰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