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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고양이 Dec 02. 2024

재의 수요일 -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명제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기독교의 핵심 명제는, 나는 꽤 오랫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짓지 않은 죄가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유전된다는데, 이걸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니. 안 믿어지는 사람들의 믿음이 없다기보다, 교회가 설명을 잘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성서가 말하는 죄를 법적인 개념으로보다는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 있어보인다. 인간에게 닥친 다양한 현실 - 재해, 고난, 죽음 등을 이해하기 위해 그 기원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신화라는 양식을 통해 이해했을때 내게는 그 의미가 훨씬 잘 스며들었다. ’신화‘라는 표현이 성서를 사실을 서술한 역사책으로 이해하는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겠지만, 신화를 ‘사실’의 반대말이 아니라, 진실을 담는 이야기로써 이해한다면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에덴동산의 타락 이야기가 아담이라는 인간 원형을 통해 인간의 고통스럽고 복잡한 운명의 기원이 무엇인지 찾고 해석한 성서 기자의 신앙적 시도의 결과로 본다면, 창조주의 뜻, 인간 원형, 죄 등에 대한 통찰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성서에서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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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기자가 의도한 죄는 원어적으로 ‘과녁을 벗어나다’의 의미이다. 끊임없이 도는 쳇바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실체가 없는 욕망을 왜인지도 모르고 탐닉하는 인간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라는 통찰로 내게 다가온다. 죄는 도덕의식 부재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갈망해야할 것을 갈망하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해 나아갈 때 생기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일 것이다. 그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인간은 실존적 죽음에 직면한다. 나를 향한 창조주의 의도와 존재와 의미와 방향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살 때, 혹은 무엇을 좇아야하는지 모르고 타인의 욕망을 답습하는 삶을 살 때 느껴지는,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상태.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한 인간들에게 ‘정녕 죽으리라’는 창조주의 사형선고의 결과였다.



아담을 최초의 인간이라기보다 인간의 보편을 담은 원형으로써 보는 것이 성서가 숨겨둔 진실에 가까워보인다. 아담의 원어적 의미는 흙 혹은 먼지(재)이다. 흙의 두 가능성. 창조주가 의지로 자신의 형상으로 빚어 숨결을 불어넣은 아름다운 피조물의 재료이지만, 동시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사분오열 갈라져 창조주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흩어져서 가치를 잃은 먼지와 같은 존재. 이것이 타락 이야기의 저자가 얻은 자기 현실에 대한 통찰이자 인간의 본질을 관통하는 진실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그리스도의 수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차갑고 새까만 잿가루가 이마 위에서 십자가의 형태로 그려졌다. 원래라면 모양을 잃고 쓸모도, 목적도 없이 흩어졌을 새까만 재 따위가 목사님의 손을 통해 십자가의 형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동안 가슴이 저릿함을 느꼈다. 쳇바퀴같은 비극적인 인간의 운명을 은혜로 환원하는 경이로움이자 신비함이었다. 그동안 목적없이 위태롭게 살던 내 삶의 형태는, 원래는 창조주가 빚었던 작품이었구나. 죄로 나를 태워 빛을 잃어서 새까맣고 못생긴 재가 되어도 나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구나. 그날밤에, 20년 신앙의 구력이 부끄러울만큼 처음으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 깊이 고백했다. 수많은 사순절을 지나며 의무적이고 상투적으로 읊었던 나의 죄가, 그날밤에야 비로소 수면위로 떠올랐다.



길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을 탕자라고 하고, 성지를 향해 계속 걸어가는 사람을 순례자라고 한다. 이제야 겨우 탕자에서 순례자로 선회한듯하나, 과녁을 향한 순례의 여정은 너무나 멀어보이고, 한치 앞도 예상할수 없어서 너무 지루하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새라 코클리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모임에서, 순례의 길을 치열하게 걷고 있는 어떤 형제가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합니까! 좋게 할 수 있으시면서!”라는 탄식에 나또한 답답해졌고, 또 다른 형제가 주어진 십자가를 힘겹게 감당한 삶의 이야기를 담담한 목소리로 전해주는 것을 들으니 십자가가 두려워졌다. 내 화살이 과녁이 빗나갔다는 것을 인식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된 과녁의 중심을 맞추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는 아직 무겁고 두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인간은 너무도 곤고하다. 곤고하다. 곤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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