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받고 싶다고 했다, 해마다 생일날에. 아, 내 생일 말고, 7월, 우리 집 쌍둥이 생일에.
어김없이 돌아온 7월, 바닥으로부터 지열이 올라온다. 미세하게 바닥 쪽으로부터 건물이, 자동차 바퀴가, 누군가의 신발이, 좌우로 흔들린다. 흔들리는 모양을 따라 그려보면 뜨거운 물체를 그릴 때 물체 위쪽에 세로로 꼬불꼬불 그리는 선의 모양이 된다. 지열의 모양. 지열을 따라 흔들리다 보면 오래전 7월의 한낮, 엄마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 있는 스물여덟의 내가 소환된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딸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 유리 벽 사이로 간절한 기도를 전하고 오는길이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씩씩하게 치료 잘 받고 엄마랑 같이 할머니 집에 가자고, 먼저 퇴원한 쌍둥이 오빠 만나러 가자고. 면회는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한 시간씩 가능하다. 밖에서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유리방 안에서 엄마를 기다릴 딸을 생각해 하루도 빼지 않고 병원에 갔다. 갈 때는 주어진 시간 동안 충분히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올 때는 친정에 두고 온 아들이 배가 고파 울까 봐 내내 종종거리며 오갔다. 엄마 집 바로 앞 팔차선 횡단보도에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흔들흔들흔 들 올라오는 지열. 이게 이렇게 보이는 거구나. 흔들흔들흔들... 흔들흔들흔들... 그러다, 삐-이 -- 잠시동안 주변 모든 게 멈춘다. 횡단보도에는 나 혼자만 남는다. 거기엔, 너무나 낯선, 엄마가 된(되어버린) 내가 그렇게 덩그러니 길 위에 있다. 젖이 흘러 가슴에 진한 무늬가 생긴 티셔츠를 입고서.
엄마가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서 도망치듯 결혼을 선택한 '나도'. 나의 엄마, 뼈대(?) 있는 ‘임’ 씨 종가에 드는 우환에 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 살림을 하면 배운 게 없어 할 줄 아는 게 기껏 살림밖에 없다고, 돈을 벌어보겠다고 나서면 살림은 뒷전이고 자식 하나도 (자식 하나에 는 종가 삼대독자 외아들 오빠만이 포함된다) 제대로 못 키운다고, 살가운 구석이라고는 없으니 남편이 저리 밖으로만 돈다고... 가끔은 존재 자체로 원망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 엄마가 이 시간을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견뎌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종종 오바이트처럼 올라오는 억울함과 비참함을 자식을 향한 폭력으로 해소하는 듯 보였다. 엄마가 가끔 친절하게 '맞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기도 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보통 오빠의 일탈이나 오빠의 성적 미달로 시작되어 '자식새끼'로 통칭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 차례 매타작이 끝난 뒤에는, 덜덜 떨며 울고 있는 우리 앞에 주저앉아 ‘이놈의 팔자’ 레퍼토리를 읊으며 우리보다 더 크게 울었다. 엄마에 대해 느끼는 연민의 감정과는 별개로 그녀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내내 따라붙는 진창과 그림자 속에서 억척스럽게 버둥거리는 그녀가 유독 큰딸인 내게로 뻗어 오는 손이 너무나 무섭고 싫어서. 그 모든 절망이 내게 옮겨붙을 거 같아서. 엄마를 떠나며 생각했다, 엄마를 용서할 수 없을 거 같다고,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쌍둥이를 임신하고 여덟 달 만에 긴급 수술을 하게 된 날, 수술실에서 나와 어른거리는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 엄마였다. 장하다, 괜찮아, 고생했다... 꾸역꾸역 말을 이어가며 엄마가 자꾸만 운다. 창피하게. ‘애가 왜 이렇게 벌벌 떠냐’고 ‘추운 거 같은데, 열이 나는 거 같 은데, 이거 좀 빨리 조치해달라’고 안 그래도 목소리 큰 엄마가 소리소리 지르며 왔다 갔다 한다. 창피하게. 엄마의 호통에 간호사들이 가져온 쭈글한 핫팩 두 개가 성에 차지 않은 엄마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페트병 두 개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수건을 둘러 가랑이 사이에 끼워준다. 창피... 까무룩 까무룩... 잠이 들다 깨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알겠다. 춥지 않다, 더이상... 따뜻하다... 엄마 때문에, 엄마가 있어서, 엄마가 있어 줘서, 더 이상 내 몸이 떨리지 않는다. 엄마가 있다.
스물두 살 된 나의 아들이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조금 있다 할거라며 물만 쭉 뿌려 놓고 돌아서려는 걸 잡아놓고, 당장 하라고 했다. 설거지하는 아들의 모습을 몇 걸음 뒤 의자에 앉아 바라본다. 세제를 왜 그렇게 많이 묻히냐, 물 좀 살살 켜라 밖으로 다 튄다, 행주도 빨아라, 행주는 꼭 짜야 냄새가 안 나는 거다... 괜히 곁에 더 머물고 싶어서 안 해도 되는 잔소리를 한다. 아들은 듣는지 안 듣는지 곁에 켜 놓은 핸드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다. 그러다, “엄마, 이 노래 나한테 좀 잘 맞는 거 같지 않아?”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물어본다. 아들의 한마디에 잔소리는 싹 잊어먹고 “어? 이 노래도 괜찮은데 바로 전에 했던 랩도 꽤 잘 어울렸어.”라며 대놓고 팬심 어린 대답을 한다. 어쩌겠나, 나는 아들의 1호 팬인걸. 아들은 내 한마디에 얼른 손을 씻더니 아주 본격적으로 노래 삼매경이다. 숟가락을 마이크 삼고. 허허... 고녀석... 참... 뉘집 자식인지... 허허...
그 여름날 뜨거운 길 위에서 엄마를 동동거리게 했던 쌍둥이가 어느새 청년이 되었다. 둘 다 올해를 기점으로 삶에 많은 선택과 변화의 시기를 가지게 될 거 같다. 더불어 각자 독립에 대한 계획도 찬찬히 해 가고 있다. 각자의 변화를 당당히 마주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용기와 열정,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며 삶에서 그걸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찡하도록 대견하고 감사하다. 더불어 그 멋진 청년들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그들 곁에 ‘엄마’로 쭉 함께 해온 나를 토닥여 주고 싶다. ‘장하다, 괜찮아, 고생했다.’ 내가 엄마가 되던 날 나의 엄마가 들려줬던 그 말을 해주고 싶다. 나에게, 그리고 나의 엄마에게도.
꽃이 받고 싶다고 했다, 꽃을 받아야겠다. 해마다, 내가 엄마가 된 날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