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오후, 웬디는 로비의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펠의 서재에서 빌린 「잊혀진 대륙의 식생」이라는 책이 놓여 있었다. 근처 협탁에 올려진 찻잔에는 베르가모트 향이 섞인 김이 포슬포슬 올라왔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가 없는 산장에서 웬디가 선택할 수 있는 놀거리는 한정적이었다. 초기에는 저녁마다 마가렛과 수다를 떨거나 헨리의 등에 타 초원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최근에는 여가 시간에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게 일상이 되었다. 펠은 직원과 사장이 서로 닮아간다며 웬디를 놀렸지만, 한편으로 책을 읽는 동료가 늘어나 기뻐했다.
책을 서른 페이지 정도 읽을 무렵, 웬디는 아직 따뜻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창밖을 바라봤다. 가을 별채 위로 분분히 떨어지는 낙엽과 겨울 별채의 시린 눈밭이 같은 창문에 담겨 있었다. 그 풍경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면, 에드먼드가 왜 이 의자에 자주 앉는지 이해가 됐다. 산장에서의 시간은 웬디의 체감상 느리게 흘렀지만, 반대로 밀도는 더욱 촘촘해졌다. 매일 저마다의 상처와 피로를 안고 오는 신비로운 손님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고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나날 속, 웬디는 점차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돌보는 요령도 익히는 중이었다.
창문에서 거두어진 시선은 프런트 위 선반으로 향했다. 아침에 마른 천으로 닦아둔 에드먼드의 은색 훈장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훈장을 볼 때마다 웬디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이 장소가 평범한 숙박 시설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과 안녕이 깃든 특별한 장소라는 걸 되새길 수 있었다. 웬디는 훈장을 향해 찻잔을 들어 보인 후 다시 책의 활자를 쫓으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평화롭던 숲의 공기가 돌연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찻잔 속의 연갈색 수면이 거칠게 요동치더니, 웬디의 손등 위로 뜨거운 찻물 몇 방울이 튀었다.
“앗!”
웬디가 깜짝 놀라며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불길한 진동이 산장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선반 위의 유리잔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렸고, 벽에 걸린 액자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위기감이 엄습한 웬디는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에드먼드가 있는 집무실로 달려갔다.
“에드먼드 씨! 지진이에요!”
난데없는 지진으로 인해 집무실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찻주전자가 책상 위에 엎어지며 찻물과 잉크가 섞인 검은 웅덩이가 흥건했고, 높이 쌓여 있던 서류들이 사방으로 펄럭거렸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에드먼드는 기울어지는 책장이 넘어지지 않도록 온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웬디, 잘 왔네! 거기 서랍이 넘어지지 않도록 꽉 잡게나!”
“네!”
웬디는 유리판이 올라간 서랍장에 몸을 밀착했다. 벽에 걸린 거울이 덜덜 떨릴 때마다 웬디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비췄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웬디는 이 공포스러운 순간이 최대한 빨리 지나가길 기도했다. 다행히 얼마 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던 지진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공명하듯 참아왔던 숨을 동시에 뱉어냈다.
“이런 규모의 지진은 산장을 지은 이후로 처음이군.”
에드먼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웬디는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들을 주우며 물었다.
“겨울 별채에 머무는 손님은 괜찮으실까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에드먼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본관 밖에서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웬디는 그 소리만 듣고도 펠임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깃털이 잔뜩 헝클어진 채로 나타난 펠은 공중에서 갈팡질팡하며 원을 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까악! 큰일이다! 초원의 호수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펠? 호수가 통째로 사라지다니?”
“말 그대로다! 호수가 있어야 할 자리에 호숫물이 증발한 것처럼 없어졌다!”
웬디는 펠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눈 또한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신발 끈을 제대로 묶을 틈도 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본관을 나선 웬디는 엉망이 된 사계절 별채의 모습을 발견했다. 봄 별채에서 날아간 벚꽃잎은 여름 별채의 울타리를 넘어 가을 별채까지 날아가 있었다. 그로 인해 가을 별채의 단풍나무 아래에는 벚꽃잎과 단풍잎이 공존하는 기괴한 풍경이 펼쳐졌다. 겨울 별채에서 흩날린 눈송이는 여름 별채의 지붕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하지만 별채의 문제는 초원에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아주 사소했다.
“세상에, 정말 호수가 사라졌어요!”
웬디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초원의 한가운데는 그야말로 뻥 뚫린 거대한 구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맑은 호숫물이 찰랑이던 수면 대신, 시꺼멓고 축축한 진흙과 표면을 징그럽게 덮은 분홍색 이끼만이 가득했다. 멀리서 본 호수는 거대한 괴물이 지면을 한입에 삼켜버리고 사라진 듯한 광경이었다. 웬디는 구덩이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는 헨리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헨리! 대체 호수에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항상 느긋함을 잃지 않고 여유로웠던 헨리도 이 순간만큼은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웬디 양. 갑자기 땅 밑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리더니, 호숫물이 물기둥처럼 위로 솟구치며 사라졌습니다.”
“위로 솟구쳤다고요?”
웬디는 고개를 위로 들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기만 했다.
“우리 집이 없어졌어! 우리의 투명한 진주 침대도 사라졌다고!”
“숲이 우리를 버린 거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웬디의 눈에 텅 빈 구덩이 위를 날아다니는 두 개의 빛줄기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손가락 크기만 한 작은 사람이었다. 한 명은 물거품을 엮어 만든 듯한 드레스 차림에 맑은 물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렸고, 다른 한 명은 갈대로 만든 옷과 이끼처럼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갈 곳 잃은 새처럼 구덩이 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헨리, 저 작은 분들은 누구예요?”
웬디는 몸을 뒤로 빼며 헨리에게 물었다.
“저 둘은 호수에서 살고 있는 요정인 멜로우와 머피입니다. 이 호수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남매 요정들이지요.”
그 말에 웬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수에 요정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그들을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요정들은 좀처럼 호수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설령 밖으로 나오더라도 달빛이 가장 밝은 한밤중에 나타나기 때문에 웬디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동화에 나오는 그 요정들이요?”
“맞습니다. 보름달이 되면 노래를 부른다는 그 요정들입니다.”
헨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멜로우가 구덩이 근처에 다가온 에드먼드를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에드먼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설명해 봐!”
멜로우는 에드먼드의 콧날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날아와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듯 물거품 드레스 위로 기포가 보글거렸다. 진주색을 띠는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동생인 머피 또한 머리카락을 고슴도치처럼 곤두세우며 에드먼드를 매섭게 노려봤다.
“분명 이 호수는 네가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저 꼴을 좀 봐! 축축하고 기분 나쁜 이끼밖에 남은 게 없어!”
두 요정이 사납게 따지고 들자, 에드먼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텅 빈 구덩이와 파들거리는 요정들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라고 이 넓은 호수를 주머니에 넣어서 숨겼겠나? 상황을 알아볼 테니 일단 진정하게.”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네 산장이 통째로 사라져도 진정할 수 있겠냐고!”
멜로우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을 때였다.
“오, 맙소사! 내 인생 최악의 기상 경험이었어!”
초원 초입에서 들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방금 잠에서 깨어났는지 머리카락이 엉망인 남자가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지붕의 각도는 분명 완벽한 45도인데, 문 앞에 쌓인 눈더미의 각도가 43도밖에 안 된다니!”
남자는 밑단에 눈이 묻은 초록색 로브 차림에, 특이하게 한 손에는 은색 줄자를 움켜쥐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지형에 따른 마력 수치를 측정하는 실측 마법사이자, 산장의 단골손님인 킬리언이었다. 그는 과거 에드먼드가 산장을 지을 만한 명당을 물색하던 당시, 마력의 흐름을 정밀하게 계산해 지금의 위치를 점지해 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 공로로 에드먼드는 킬리언이 마음껏 별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일 년 중 가장 날씨가 더운 한여름에 겨울 별채에서 며칠씩 휴가를 보냈다.
“심미적으로도 최악이야! 왜 가을 별채 쪽은 벚꽃잎과 단풍잎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는 거지? 이건 내가 생각한 완벽한 사계절에 벗어난 일이야!”
킬리언은 씩씩거리며 웬디와 에드먼드 일행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통째로 사라진 호수 구덩이를 향한 순간, 킬리언은 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가 들고 있던 은색 줄자는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설계한 이 완벽한 풍경에 이런 추악한 구덩이가 생기다니!”
“으아앙!”
킬리언의 비명 같은 외침이 도화선이 된 듯, 멜로우와 머피가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두 요정이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서럽게 통곡하자, 그들의 눈물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빗줄기가 되어 구덩이 주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앙! 우리 집 돌려내!”
“우리 침대도, 식탁도 전부 진흙투성이가 됐을 거야!”
“오, 제발 이 끔찍한 울음소리를 멈춰주세요! 그리고 이 비에서는 왜 연꽃 향기가 나는 거야? 비라면 모름지기 무색무취여야 정상이거늘!”
킬리언은 자신의 로브가 젖는 것보다 비에서 나는 짙은 꽃향기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불안한 강아지처럼 머리를 감싸 쥐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웬디는 요정들의 울음소리와 킬리언의 히스테릭한 비명, 그리고 코를 찌르는 강렬한 연꽃 향기 사이에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킬리언 씨, 일단 비부터 피하고 말씀하세요! 멜로우 씨와 머피 씨? 두 분도 그만 우시고요! 에드먼드 씨가 분명 방법을 찾으실 거예요!”
웬디는 양손을 흔들며 중재에 나섰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요정들은 에드먼드의 귓가를 맴돌며 책임지라고 악을 썼고, 킬리언은 구덩이 가장자리를 줄자로 재보려다 진흙에 구두코가 더러워지자,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내 삶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까악! 저 마법사 좀 봐! 요정들보다 더 크게 우는 것 같다!”
헨리의 머리 위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펠은 복잡한 웬디의 마음도 모른 채 낄낄거리며 웃기 바빴다. 헨리 또한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이 정신없는 소동의 중심에 선 웬디는 에드먼드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에드먼드는 빗물에 젖어 축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겼다.
“난장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