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호수가 사라진 날 (2)

by 달빛타래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은 에드먼드는 젖은 셔츠 깃을 매만지며 뻥 뚫린 구덩이 안으로 걸어갔다. 웬디는 그의 뒤를 따르며 발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호수 바닥에 깔린 진흙은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은한 광택이 감돌았고, 작은 돌 위에 낀 이끼들은 불길한 분홍빛이 번쩍였다. 질척이는 진흙 사이로 뻗어 나간 이끼들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웬디는 그 모습이 마치 맥박이 뛰는 실핏줄처럼 느껴져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불쾌한 촉감이 신발을 타고 전해질까 두려워 까치발로 조심조심 에드먼드의 곁에 도달했다.


“아까 헨리가 호숫물이 물기둥처럼 솟구쳤다고 했는데, 혹시 누군가 호수를 통째로 훔쳐 간 건 아닐까요?”

“누군가 훔쳐 갔다고?”

“네. 아까 보니까 이 주변만 물난리가 나고 초원의 풀에는 물기가 전혀 없더라고요.”

주변을 둘러보던 에드먼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흠 소리를 냈다.


“이 정도 질량의 물을 한 번에 이동시키려면, 산맥 하나를 통째로 태울 만큼의 마력이 필요하네.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면 숲이 먼저 내게 경고했을 거야. 헨리도 금방 침입자를 알아냈을 거고.”

“그러면 숲의 마법이 일시적으로 오류를 일으켰을 가능성은요?”

웬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가전제품도 오래 쓰면 과부하가 걸리잖아요. 산장이 지어진 지 꽤 오래됐으니, 잠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요?”

웬디의 입장에선 나름 합리적인 가정이었지만, 에드먼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숲에 걸린 마법은 기계 장치와는 결이 다르네. 오히려 생명체에 가깝지. 생명체의 몸에 과부하가 걸린다고 해서 장기 하나를 통째로 떼어내 버리지는 않지.”

“그건 그렇네요.”

자신의 추측이 번번이 막히자, 웬디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 사이 빗물에 섞인 연꽃 향기는 점점 진해져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킬리언은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이건 비논리적이야!”라는 말을 꺼냈다.

“에드먼드 경.”

그때, 빗속을 뚫고 나타난 헨리가 구덩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헨리의 회색 갈기는 요정들의 눈물에 젖어 보석처럼 찰랑거리고 있었다.


“숲이 생명체에 가깝다는 말씀을 듣고 든 생각입니다만, 혹시 호수는 사라진 게 아니라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요?”

“숨겨져 있다?”

“누구든 감당할 수 없는 벅찬 상황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지 않습니까? 하지만 눈이 눈꺼풀 뒤로 숨는다고 해서 그걸 두고 사라진다고 표현하진 않죠.”

헨리의 나직한 목소리가 물안개처럼 퍼진 빗줄기 사이로 깔렸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웬디의 오래된 기억 하나를 건드렸다. 어린 시절 웬디가 살던 마을에는 외곽을 따라 작은 하천이 흘렀다. 웬디는 가끔 엄마의 손을 잡고 하천을 따라 걷곤 했는데, 그날은 자욱한 물안개가 하천 주변을 통째로 집어삼킨 날이었다. 어린 웬디는 안개에 가려 형체도 보이지 않는 하천이 사라진 줄 알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졌다고 믿는, 어린아이가 으레 느끼는 호들갑이었다. 그때 엄마인 메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웬디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웬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야. 물안개가 걷히면 다시 하천이 보이듯, 소중한 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란다.”

그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자, 웬디는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왜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는 거지?’

요정들이 악을 쓰고, 킬리언이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이 난장판 속에서 왜 뜬금없는 향수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웬디는 짧은 상념을 털어내려 애쓰며 에드먼드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구덩이를 바라보며 헨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헨리는 허공을 향해 콧구멍을 실룩이며 말했다.


“저는 경처럼 마법을 부릴 수는 없지만, 지금 초원에 부는 바람에서 지친 사람이 내뱉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납니다.”

“지친 사람이 내뱉는 것이라.”

에드먼드는 헨리의 말을 곱씹으며 호수 바닥에 깔린 분홍색 이끼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자 이끼에서 웅 하는 선명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웬디는 알 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 묘한 진동은 공기를 타고 퍼져 모두의 불편한 감각을 일깨웠다. 에드먼드 또한 비슷한 감각을 느꼈는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끼에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고?”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에드먼드는 고개를 홱 돌려 구덩이 밖을 바라봤다.


“멜로우, 머피! 적당히 울고 여기로 와보게!”

에드먼드의 부름에 통곡하던 요정들이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날아왔다. 멜로우는 히끅 딸꾹질하며 에드먼드의 어깨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머피는 사나운 눈매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그의 눈앞에서 팔짱을 꼈다. 에드먼드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분홍색 이끼를 그들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호수의 이끼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 알고 있나?”

두 요정은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이끼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 이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을 거야.”

머피가 녹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먼저 답했다.


“그러면 최근 호수를 방문한 손님들에게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나? 평소와 다른 분위기라거나 그런 것들 말일세.”

“특이한 점이라...”

곰곰이 생각에 잠긴 머피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다들 한숨을 크게 내쉬더라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손님마다 땅이 꺼질 기세로 숨을 뱉어내는 바람에 물결이 다 일렁일 정도였어.”

그 말에, 옆에 있던 멜로우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맞아. 보고 있으면 우리까지 기분이 가라앉을 지경이라서 너무 우울해 보이는 손님이 보이면 정신 좀 차리라고 호숫물에 확 담가 버렸지.”

“손님을 호숫물에 빠뜨렸다고?”

에드먼드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멜로우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게 우리 나름의 시원한 환대였다고!”

에드먼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웬디는 그 웃음이 황당한 심정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했지만, 에드먼드의 눈에는 어딘가 확신에 찬 빛이 떠올랐다.


“헨리의 말이 맞았군. 호수는 사라진 게 아니라 숲에 의해 보이지 않게 된 걸세.”

“이 큰 호수가 어디로요? 구름 뒤에라도 있는 건가요?”

웬디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자, 에드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공간의 뒤편으로 밀려난 거라네. 피곤함을 지닌 채 이곳을 방문한 손님들이 호숫물에 빠지면서 문제가 생긴 거야.”

웬디는 그제야 에드먼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손님들의 근심과 걱정이 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거군요? 감정이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숲의 정령들도 발견하지 못한 거고요?”

“그래. 앙금처럼 가라앉은 감정 찌꺼기들이 이끼에 붙으며 이런 색깔이 된 거지.”

에드먼드는 분홍빛 이끼를 다시 한번 매만졌다. 여전히 이끼에서는 듣는 사람을 피로하게 만드는 기묘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사장의 무리한 물건 발주로 며칠 동안 잔업에 참여하던 날, 웬디가 느꼈던 고단함과 짜증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굳이 호수를 통째로 감출 필요가 있을까요?”

웬디는 양손으로 귀를 꽉 막으며 물었다.


“자네가 아까 말한 기계 장치로 비유하자면, 숲은 호수 바닥에 쌓인 감정들을 감지하고 ‘자가 정화’ 상태로 들어간 셈이라네. 호숫물을 잠시 다른 차원의 주머니에 넣고, 저 이끼들을 필터 삼아 찌꺼기를 흡수한 거지.”

웬디는 에드먼드가 말하는 마법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일단 구덩이에 있는 이끼부터 제거해야겠네요.”

“정답이라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본관으로 돌아가 삽과 자루를 들고 오려던 웬디는 어째서인지 에드먼드의 표정이 어둡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원인은 알았지만,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군.”

“왜 그러세요? 이끼를 제거하고 호숫물을 이곳에 되돌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공간의 이음새를 여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라네. 하지만 문제는 정밀함이야.”

“정밀함이요?”

웬디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숲이 호수를 숨기는 과정에서 초원의 마력이 엉망으로 꼬였다네. 이 상태에서 내가 억지로 문을 열었다간, 그 거대한 물 덩어리가 여기가 아니라 본관이나 별채 위로 쏟아져 수몰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네.”

웬디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바닷가에서도 간혹 높이 솟는 파도가 해안가를 덮칠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질 때가 있었는데, 수천 톤에 이르는 물덩이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드먼드는 자신의 투박한 손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웬디,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큰 힘을 다루는 데는 익숙하지만, 소수점 단위의 오차를 잡아내는 세밀한 계산은 젬병이라네. 호수를 복원하기 위해선 물이 떨어질 출구의 좌표를 조금의 오차도 없이 계산해야 하는데, 그건 내 영역 밖이야.”

에드먼드가 어떻게 이 난관을 풀어나갈지 고민하는 사이, 구덩이 근처에서 실성한 듯 웃고 있던 킬리언이 잔뜩 흥분한 채 소리쳤다.


“오, 맙소사! 내가 설계한 완벽한 전경에 이런 치명적인 오점이라니! 이런 상태로는 비가 일주일 내내 내려도 호수를 채우지 못할 거예요!”

킬리언은 은색 줄자를 휘두르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웬디는 그런 킬리언의 눈에서 단순한 짜증이 아닌, 산장의 균형이 무너진 것에 대한 고통이 읽혔다. 문득 그녀는 킬리언의 직업이 마력 수치를 계산하는 실측 마법사라는 걸 떠올렸다.


“에드먼드 씨, 저기 좌표 계산을 도와줄 분이 계시잖아요.”

웬디가 킬리언을 눈짓하며 속삭이자, 에드먼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호수 크기의 좌표 계산은 아무리 킬리언이라도 몇 시간이 걸리는 대작업이라네. 그런 부탁을 그냥 해달라고 하기엔 무리이지 않겠나? 킬리언도 휴식을 취하러 이곳에 방문했는데 말이야.”

“그러면 제가 킬리언 씨를 설득해 봐도 될까요?”

에드먼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답했다. 웬디는 진흙투성이 신발로 열심히 뛰어 킬리언의 앞으로 다가갔다.

“킬리언 씨.”

“오, 웬디! 당신 앞치마에 묻은 흙 자국도 무질서해서 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요!”

킬리언이 괴롭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웬디는 물러서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킬리언 씨, 당신은 이 산장의 터를 잡으신 분이죠? 에드먼드 씨조차 갈팡질팡하던 이 거대한 숲에서, 가장 완벽한 마력의 흐름을 찾아내 지금의 산장을 지을 수 있게 해주신 분이잖아요.”

웬디의 말에 킬리언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턱을 까딱였다.


“물론입니다. 다른 무식한 마법사들은 이곳만큼 완벽한 지형을 찾을 수 없죠. 저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엉망이 된 이 공간을 완벽하게 되돌릴 수 있는 사람도, 오직 킬리언 씨밖에 없다는 말이네요?”

계속되는 칭찬 일색에 킬리언의 어깨가 으쓱했다. 웬디는 킬리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드먼드 씨가 사라진 호숫물을 다시 꺼낼 계획인데, 문이 열릴 정확한 위치를 계산해 줄 수 있는 ‘아주 뛰어난’ 전문가가 필요했거든요.”

웬디가 아주 뛰어나다는 단어를 강조하자, 킬리언의 눈이 반짝거렸다. 웬디는 그런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부디 무너진 황금비를 다시 세우고, 이 숲을 당신이 처음 발견했던 완벽한 상태로 되돌려주세요. 이건 가여운 호수 요정들의 보금자리를 되돌려주는 동시에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웬디의 말이 끝날 즈음, 킬리언의 눈빛은 더 없이 반짝였다.


“흥,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요. 나 말고 다른 마법사에게 이런 중대한 실측을 맡기는 건, 원숭이에게 시계를 고치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죠!”

그는 은색 줄자를 꽉 쥐고 스스로 구덩이 안으로 걸어갔다.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로브 끝자락에 지저분한 진흙이 묻었지만, 킬리언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줄자를 좌우로 뻗으며 측량을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대충 견적을 마쳤는지, 킬리언은 둥근 안경을 치켜올리며 에드먼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 당신은 이제부터 문을 열 준비나 하세요. 내가 좌표를 소수점 자리까지 뽑아줄 테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힘을 쏟으세요!”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인 에드먼드는 환한 표정을 짓는 웬디를 힐끗 쳐다봤다. 웬디가 허공에 손을 맞부딪히는 시늉을 하자, 에드먼드 또한 옆구리에 손을 살짝 움직이며 호응했다.

이전 19화7장. 호수가 사라진 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