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밤, 에드먼드의 집무실에는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울려 퍼졌다. 집무실의 등불은 편지가 가득 쌓인 책상과 의자에 앉아 열심히 깃펜을 움직이는 에드먼드와 웬디를 밝혔다. 다가올 새해를 앞두고 에드먼드는 한 해 동안 산장을 방문한 손님들을 위한 감사 편지를 쓰고 있었고, 이를 안 웬디가 자신도 돕겠다며 기꺼이 나섰다. 오후부터 시작된 편지 쓰기는 저녁을 먹고 창밖이 깊은 어둠에 잠길 때까지 이어졌지만, 여전히 쓴 편지보다 남은 편지가 더 많았다.
웬디는 오른손 검지가 뻣뻣해지는 걸 느꼈지만, 정성스럽게 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손날 부근에는 희미한 잉크 자국이 묻어 있었다. 처음에는 물을 묻힌 수건으로 몇 번 닦아냈지만, 그 횟수가 다섯 번을 넘은 뒤로는 편지에 묻지 않도록 조심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쌓아 놓은 편지 봉투 위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지금도 현역으로 일하는 뱀파이어 코코 와일드부터 안갯속에서 구출한 천재 소년 에반 마일로, 그리고 자신만의 그림자를 찾은 앨리스까지, 산장을 거쳐 간 이들을 위해 글자를 한 자씩 적을 때마다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잔상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또 한 장의 편지를 봉투에 담은 웬디가 펜을 내려놓으며 기지개를 켰다.
“힘들면 언제든 쉬어도 된다네.”
건너편에서 에드먼드가 시선을 편지에 고정한 채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탄 홍차를 홀짝이며 자신이 쓴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웬디는 자신보다 두 배 이상 높게 쌓인 에드먼드의 편지 봉투들을 보며 신기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그렇게 편지를 빨리 쓰시는 거예요? 마법 깃펜을 쓰지도 않으시고요.”
에드먼드는 평소 일을 할 때 생각한 바를 대신 써주는 마법 깃펜을 사용했다. 그걸 아는 웬디가 편하고 빠른 방법을 제안했지만, 그는 손님들을 위한 편지만큼은 직접 손으로 써야 한다며 마법 깃펜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동안 쓴 편지의 수천 장이 넘는데, 편지 문구 정도야 쉽게 쓸 수 있지.”
“매년 이 많은 편지들을 혼자 쓰셨던 거예요?”
웬디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지만, 에드먼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는 산장이 지어진 첫해부터 썼다네. 나름대로 전통이라면 전통이지.”
“혼자 편지를 쓰는 게 힘들진 않으세요?”
에드먼드는 찻잔을 살짝 기울인 뒤 답했다.
“당연히 힘들지. 하지만 편지를 쓰면서 손님들이 산장에서 겪은 일들을 되짚어 보면, 지금의 고요함이 걱정이 아니라 기다림이 되지. 그리고 감사의 마음이란 건 제때 전하지 않으면 금방 휘발되어 버려서 꼭 잊기 전에 써야 한다네.”
웬디는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제때 전하지 않으면 휘발되어 버리는 마음. 그녀는 살면서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정성스러운 편지를 써본 적이 없었다. 과거의 인연은 계산기에서 쉽게 출력한 뒤 쓰레기통으로 던져지는 영수증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곳 산장에서 이어진 인연은 에드먼드의 말처럼 다음 만남을 기대하는 매듭이 되어 웬디의 삶을 단단히 묶어줬다.
에드먼드는 다시 깃펜을 들어 잉크병에 살짝 적셨다. 펜촉이 병 입구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웬디는 남색 잉크가 펜촉을 따라 설렘을 써내려 가는 과정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에드먼드 씨,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음, 뭔가?”
에드먼드는 시선을 편지에 고정한 채 말했다.
“저희가 지금 편지를 쓰는 분들은 대부분 단골손님이잖아요. 그런데 이 산장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데, 손님들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오는 거예요?”
에드먼드는 잠시 깃펜을 멈추고 쓰고 있는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보라색 불꽃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비쳐 신비로운 빛을 내뿜었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네.”
에드먼드는 두 손가락을 피며 말했다.
“자네가 쓰고 있는 편지처럼, 기존의 손님들이 내게 허락을 구하고 지인들에게 이곳을 소개하는 경우지.”
“다른 방법은요?”
“숲이 직접 손님들을 부르는 경우지.”
웬디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숲이 직접요?”
“그래. 숲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음 속에서도, 누군가의 지친 목소리를 잘 찾아낸다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는 이들을 발견하면, 숲은 그들을 위한 초대장을 보내거나 직접 데려오지. 지난번 도플갱어 손님의 경우처럼 말이야.”
웬디는 자신이 어떻게 산장에 왔는지 모른 채 당황하던 앨리스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나무가 종이를 빚기라도 하나요? 아니면 숲도 에드먼드 씨처럼 마법을 부리는 건가요?”
“하하하.”
웬디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에드먼드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책상 위 나뭇가지에서 졸고 있던 펠이 깜짝 놀라 날개를 푸닥거렸다.
“정 궁금하면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군. 보고 싶나?”
“네!”
웬디는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아내고 재빨리 일어났다. 에드먼드는 품에서 나비 모양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꽂았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자, 조금 전까지 그들을 감싸던 겨울밤의 고요함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문 너머에서 불어온 공기는 수만 가지 생명이 동시에 내뱉는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 웬디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흙내음과 꽃향기에 취해 잠시 멈춰 섰다. 오랜만에 들린 곳이지만, 에드먼드의 화원은 다시 봐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입 벌리고 서 있으면 나비가 들어가겠군.”
에드먼드의 짓궂은 농담에, 웬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푸른 보석을 잘게 부순 듯한 잔디가 그들을 환영하듯 흔들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겨울 달빛은 화원의 꽃잎들을 은으로 세공하듯 반짝이게 했다. 분명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사계절의 숨결이지만, 이 화원에서는 신기하게도 하나의 교향곡처럼 어우러졌다.
에드먼드는 익숙하게 화원 중앙, 넝쿨이 우아하게 휘감긴 철제 테이블로 향했다. 그 위에는 은은한 달빛을 반사하는 찻주전자와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음 웬디는 그것이 당연히 에드먼드가 사용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치우는 것을 잊었다고 하기엔 찻잔의 배치가 지난번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찻잔 받침 위에 가지런히 얹어진 티스푼은 사용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런 섬세한 꽃무늬는 에드먼드 씨의 취향이 아니야.’
이상한 구석이 하나둘씩 눈에 보이자, 웬디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에드먼드 씨, 여기에 손님이 오실 예정인가요?”
“손님? 그럴 리가. 알다시피 여기는 산장을 관리하는 이들만 출입하는 곳이라네.”
“그러면 저 찻잔의 주인은 누구예요?”
웬디가 손으로 테이블의 찻잔을 가리키자, 에드먼드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당연한 일상이라 이상함을 깨닫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그리고 웬디는 곧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찻잔을 바라보는 에드먼드의 시선 속에서 어떤 애틋한 감정이 느껴진 것이다. 찻잔 끝을 손가락으로 훑는 에드먼드의 손길은 유리 조각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그는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냥 둔 걸세. 이렇게 멋진 화원에 이런 찻잔이 장식으로 있다면 운치가 있지 않나?”
“하지만 티스푼까지 이렇게 놓여 있는 건 이상한데요.”
“크흠!”
에드먼드는 일부러 헛기침을 크게 하며 대답을 피했다.
“초대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나 궁금하다고 했던가?”
에드먼드는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웬디를 화원의 안쪽으로 데려갔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웬디에게도 익숙한 꽃이 있었다. 바로 메리가 어린 시절 에드먼드와 함께 찾았다는 붉은 꽃이었다. 화원에는 수많은 꽃이 있지만, 웬디의 눈길은 이상할 정도로 그 꽃으로 향했다. 다들 자신의 매력을 뽐내며 화려하게 피어 있는 가운데 저 붉은 꽃만 밤의 추위를 홀로 견디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자네는 줄곧 그 꽃만 바라보는군.”
“네. 엄마와 관련된 꽃이라 그런지, 유독 정감이 가네요.”
웬디의 말에 에드먼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닐 걸세. 자네가 그 꽃에 마음이 쓰이는 건 꽃이 먼저 자네의 마음을 보듬으면서 인연의 실이 연결된 덕분이라네.”
“인연의 실?”
웬디는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살폈다. 혹시 에드먼드의 눈에는 자신과 꽃 사이에 연결된 선이 보이는 걸까? 에드먼드는 그런 웬디의 행동에 실소를 보였다.
“비유적인 표현이라네.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네를 이곳에 불러오게 한 장본인이 저 꽃이라는 말일세.”
“... 저 꽃이 저를요?”
웬디는 당황하는 바람에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엄마가 남긴 초대장 덕분이었잖아요.”
“초대장이 누구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누군가 세상일로 힘들어하면 이 화원에 있는 꽃 중 하나가 반응한다네. 그 붉은 꽃은 자네가 도시에서 힘들어하던 때, 이곳에서 떨기 시작했을 걸세. 자네의 불안과 고단함, 그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저 꽃이 가장 먼저 알아챈 게지.”
웬디는 그 말을 듣고 굳어버린 듯 멈춰 섰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녀는 숲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시간 가속 마법을 견디지 못한 에반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앨리스도, 모두 숲이 먼저 이곳으로 불러온 손님들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산장의 직원이기 이전에 이 숲이 불러낸 한 명의 손님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웬디는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제가 에드먼드 씨의 산장에 올 수 있었던 건, 엄마의 흔적이 아니라 저 꽃 덕분이라는 거네요.”
에드먼드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웬디는 떨리는 눈으로 붉은 꽃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달빛 아래에서 파르르 떨리는 붉은 꽃잎은 차가운 밤거리에서 어깨를 움츠리던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웬디는 그제야 이 화원에서 홀로 떨어진 듯한 꽃이 머릿속에 깊이 남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웬디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붉은 꽃과 눈을 맞췄다.
“네 덕분에 매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어. 나를 찾아주고 이곳에 불러줘서 정말 고마워.”
웬디가 자신의 진심을 전하며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꽃잎에 닿는 순간, 놀랍게도 꽃의 떨림이 뚝 멈췄다. 마치 이제야 주인을 찾았다는 듯 붉은 꽃은 웬디의 손가락 끝에서 평온함을 되찾았다. 처음으로 느끼는 자연과의 교감에, 웬디는 마음이 풍족해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웬디가 꽃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자, 에드먼드가 다가오며 말했다.
“숲의 초대장은 서로의 진심이 닿았을 때 비로소 그 형태를 갖춘다네. 자네가 이 아이의 떨림을 알아봐 줬으니, 저 꽃도 역할을 다할 때가 된 것 같군.”
말을 마친 에드먼드는 짧은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새빨간 꽃 주변으로 별빛과 같은 가루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꽃잎 위로 별 가루가 사뿐히 내려앉자, 곧바로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더니,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올랐다. 넓게 펼쳐진 꽃봉오리는 스스로 접히며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 냈다. 부드러운 꽃잎은 어느새 매끄러운 종이의 질감으로 변하고, 줄기와 맞닿은 부분은 테두리가 되어 봉투의 가장자리를 장식했다.
마지막으로 꽃의 수술이 금색 인장이 되어 봉투에 찍히는 순간, 맑은 종소리가 화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웬디와 인사를 나누던 생생한 꽃은 완벽한 초대장이 되어 에드먼드의 손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에드먼드는 갓 만들어져 숲의 온기를 머금은 초대장을 웬디에게 건넸다.
“받게. 웬디, 자네 것이라네.”
“제 것이라고요?”
웬디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초대장을 받았다.
“꽃이 자네를 만나고 스스로 초대장이 되길 바란 것이니, 초대장의 주인은 당연히 자네라네. 이걸 누구에게 선물할지는 전적으로 자네의 선택이라네. 꽃이 자네를 믿고 건네준 것이니, 자네의 요란스러운 오지랖으로 온기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쓰도록 하게.”
웬디는 초대장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초대장의 온기는 갓 구워낸 빵처럼 따스했다. 이건 단순히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언제나 대체가 가능한 부품처럼 살았던 그녀에게 이방인이 아닌, 산장의 진짜 가족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신분증이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깊은 소속감에 웬디는 큰 감격을 느끼고 울컥했다. 웬디는 붉은 꽃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에드먼드를 돌아봤다.
“네, 절대 이 초대장을 헛되이 쓰지 않을게요. 그리고 저를 이곳에 받아준 에드먼드 씨에게도 감사드려요.”
웬디는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에드먼드는 짐짓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먼저 집무실로 이어진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돌아가지. 날씨가 추워서 잉크가 굳으면 안 되니까.”
“네!”
웬디는 새하얀 꽃과 초대장을 번갈아 본 뒤 그를 따라 화원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의 뒤로 은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웬디는 왠지 그 소리가 화원이 그들을 배웅하는 것처럼 들렸다. 집무실로 돌아온 에드먼드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고쳐 썼다. 웬디 역시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 손에 들린 초대장을 잘 보이도록 비스듬하게 세웠다.
“아직 써야 할 편지가 가득이군. 밤새도록 써도 끝낼 수 있을지 모르니, 적당히 쓰다가 자러 가게.”
“네, 그럴게요.”
웬디는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마저 다정하게 느껴져 미소를 지었다. 웬디는 깃펜을 고쳐 잡고, 다시 편지를 쓸 준비를 마쳤다. 웬디는 새로운 편지지와 봉투를 꺼내고 손님들의 주소록을 훑어봤다. 손님들의 주소와 언제 방문했는지를 참고하던 웬디의 눈에 어떤 손님의 정보가 띄었다.
“이분은 왜 산장을 방문한 날짜가 없지?”
편지를 쓸 손님 목록에는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이상하게도 산장을 방문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에반이나 앨리스처럼 특별한 예약 없이 산장에 머문 이들도 기록은 남아 있었기에 더욱 특이한 경우였다.
“에드먼드 씨, 리안이라는 손님은 누구인지 아시나요?”
웬디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순간, 집무실에 툭 소리가 울렸다. 에드먼드가 들고 있던 깃펜을 놓치면서 난 소리였다. 거기다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하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웬디는 그런 에드먼드의 반응이 낯설어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은 그냥 넘어가게.”
에드먼드는 간신히 입을 열고 그렇게 말했다.
“네? 왜요?”
“자네가 알 필요 없는 사람이라네.”
에드먼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순히 귀찮은 질문을 피하는 퉁명스러움이 아니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깊은 흉터를 들켰을 때 나오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가까웠다. 마치 창고에서 훈장을 발견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도 내년에는 오실 수도 있으니까, 편지를 써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그럴 일은 없네. 미안하지만 그 손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게나.”
에드먼드는 웬디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무덤덤하긴 해도 늘 친절하게 대하던 에드먼드가 처음으로 보여준 모습에, 웬디는 입을 달싹이다 다물렸다. 방금까지 따뜻했던 집무실의 공기가 일순간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네, 그러면 이분은 넘어갈게요.”
“고맙네.”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집무실에는 다시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만이 이어졌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장작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 개의 편지를 연달아 쓴 웬디는 다음 편지를 쓰려다 에드먼드의 얼굴을 몰래 살폈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지만, 편지를 쓰다가도 한 번씩 생각에 잠기듯 멈칫하곤 했다.
‘대체 리안이라는 분이 누구길래 저럴까? 어색한 지인일까? 아니면 관계가 틀어진 사이일까?’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던 웬디는 문득 화원에 있던 테이블에서 에드먼드가 보인 눈빛이 머릿속에 스쳤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섬세한 꽃무늬 찻잔과 에드먼드의 쓸쓸한 눈동자. 웬디는 설마 그 상대가 리안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너무 실례되는 생각인 것 같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곤 잡념을 털어내듯 깃펜을 꾹 쥐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나머지 손님의 안녕을 적어 내려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