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미련을 떠나보내는 밤 (3)

by 달빛타래

다시 방으로 돌아온 웬디는 침대에 얼굴을 푹 묻었다. 청소하는 중에 쌓인 피로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눌렀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이 또렷해져 잠이 오지 않았다. 엎드린 자세로 한참을 누워있던 웬디는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몸을 일으킨 웬디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곳을 찾은 수많은 손님이 에드먼드가 일궈낸 마법 같은 공간에서 묵은 상처와 피로를 씻어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얻어 돌아갔다. 그러나 정작 산장의 주인인 에드먼드가 수십 년 전의 약속 하나에 발이 묶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박제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타인의 쉼표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장에는 쉼표를 찍지 못하는 마법사, 웬디는 그런 마법사에게도 누군가는 쉼표를 찍어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웬디는 곧바로 책상 서랍을 열어 에드먼드가 선물했던 장미색 초대장을 꺼냈다. 이어 세워진 깃펜을 집은 그녀는 검은색 잉크통에 펜촉을 깊숙이 담갔다.


[얼굴도 성함도 알지 못하는 리안 씨에게]


펜촉이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웬디의 손끝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웬디는 자신이 느낀 진심을 이 한 장의 초대장에 쏟아붓기로 했다.


[저는 에드먼드 씨의 산장에서 일하는 웬디라고 해요. 우연한 기회로 당신이 남긴 오래된 편지를 읽고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어요.

당신이 응원했던 ‘에디’는 이제 수만 송이의 꽃을 피워내고 숲을 지키는 산장 주인이 되었어요. 그가 가꾼 산장은 삶에 지친 수많은 이들이 안식을 찾는 보금자리가 됐어요. 하지만 정작 에드먼드 씨는 여전히 자신의 화원에 주인 모를 찻잔을 올려둔 채, 창가에 꽃 한 송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매일 밤 짙은 어둠을 응시하곤 해요.

에드먼드 씨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믿은 세상의 온기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걸지도 몰라요. 타인에게는 따뜻한 쉼터를 선물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흐르지 못한 채 멈춰 선 뒷모습이 마음이 아파 모른 척할 수 없었어요.

리안 씨, 이제는 그의 적막한 창가에 당신이 약속했던 꽃을 놓아야 할 때가 아닐까요?

부디 숲의 간절한 바람이 바람을 타고 당신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산장의 새로운 식구, 웬디 올림]


편지에 가까운 초대장을 다 쓴 웬디는 갑자기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홧김에 리안을 위한 초대장을 쓰긴 했지만, 정작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웬디가 있는 숲으로 앨리스를 데려온 숲이라면, 반대로 어디에 있는지 모를 리안에게 이 초대장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웬디는 곧바로 초대장을 책상에 내려놓은 채 눈을 꼭 감았다.


“숲님. 당신이 저를 이곳에 불러주신 것처럼 이 편지도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해 주세요. 에드먼드 씨의 기다림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렇게 웬디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끝나는 순간이었다. 창밖에서 나뭇가지가 스치는 듯한 소리가 웬디의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뜬 웬디는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잠시 후, 본관 벽에 붙어 있는 넝쿨이 뱀처럼 매끄럽게 창틀을 타고 올라오더니, 보물을 다루듯 커다란 잎사귀로 초대장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초대장을 감싼 잎사귀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스스로 창밖으로 떨어졌다. 웬디는 허겁지겁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 한 점 없는 밤하늘에 청량한 돌풍이 휘몰아치며 초대장을 감싼 잎사귀가 숲 너머, 보이지 않는 수평선 끝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 비현실적인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웬디는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낸 진심이 리안의 창가에 닿기를 바라며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


* *


초대장을 보낸 뒤로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웬디는 붕 뜬 마음을 다잡지 못해 산장 구석구석을 서성였다. 매일 아침 별채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쓸며 산장의 입구를 훑었지만, 방문하기로 예정된 손님 말고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앞서나간 걸까?’

그쯤 되니 웬디도 슬슬 불안해졌다. 초대장을 챙겨간 숲이 결국 리안을 찾지 못했는지, 아니면 편지를 받은 리안이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초대장은 그녀의 손을 떠났기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빗자루를 들고나온 웬디의 코끝으로 바람결을 타고 불어온 낯선 향기가 스쳤다. 동시에 정체 모를 그림자 하나가 산장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잃은 손님이라기엔 걸음걸이가 너무 느긋했고, 숲의 정적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웬디는 자신도 모르게 빗자루를 꼭 쥔 채 그림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적한 숲길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온 사람은 짙은 베이지색 코트와 붉은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여성이었다.

그녀는 본관으로 향하는 언덕길에 멈춰서서 사계절이 가득한 별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주 오래전 꿈속에서 보았던 장소를 찾아낸 듯,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그리움과 안도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별채를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뒤늦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웬디를 발견했다.


“여기가 에디... 아니, 에드먼드 씨가 운영하는 산장인가요?”

웬디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에드먼드를 에디라고 부르는 조심스러운 어투와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낸 것이다. 웬디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혹시 리안 씨인가요?”

상대는 잠시 놀란 눈이 되었지만, 이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쪽이 웬디 씨인가 보네요.”

그녀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장미색 초대장이었다. 웬디는 자신이 보낸 투박한 초대장이 정말로 리안을 이곳에 데리고 왔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이 편지를 읽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답니다. 바깥에서 에디의 산장이 얼마나 유명한지 익히 들었거든요. 지친 이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산장 주인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내가 알던 다정한 에디가 돌아왔구나 싶어 안도했죠.”

리안은 산장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말에 웬디가 궁금증을 찾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소식을 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이제야 오신 건가요? 리안 씨라면 초대장이 없어도 언제든 오실 수 있잖아요.”

손에 쥔 장미색 초대장을 매만지던 리안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저는 바깥에서 종족을 가리지 않는 심리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어요.”

의외의 대답에 웬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 이들이나, 타고난 자신의 태생을 부정하며 본인을 괴롭히는 이들이 제 상담소를 찾아오곤 하죠. 처음에는 의자 두 개뿐인 작은 상담실로 시작했지만, 점차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정식으로 상담소를 차리게 됐어요.”

“......”
“세상에는 몸이 아픈 것처럼 마음이 아픈 존재들이 참 많아요. 저는 그들이 자신만의 길을 잃지 않도록 등대 역할을 해주고 싶었죠. 물론 저 혼자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 눈에 보이는 이들을 외면하고 발길을 돌리기가 어려웠어요.”

웬디는 리안의 말을 들으며 문득 에드먼드를 떠올렸다. 리안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온기를 되찾아 준다면, 에드먼드는 이곳에서 지친 이들을 위한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내어줬다. 표현하는 방식도 머무는 장소도 다르지만,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방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멈춰 서야 할 때를 다정하게 알려주는 쉼표 같은 존재들. 웬디는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끼며 리안을 바라봤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리안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런저런 변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겁이 났기 때문인 것 같아요.”

“겁이 났다고요?”

“에디가 세상을 등지고 숲으로 들어갈 때, 끝내 곁을 지키지 못한 나를 미워할 거라 믿었거든요. 실제로 작별의 편지를 보낸 이후로 답장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 무응답이 에디가 나를 향해 보내는 거절의 증거라고 믿었어요.”

웬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드먼드가 매일 화원의 찻잔을 닦고 밤마다 숲을 응시하던 건 거절이라기보단 어떠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제가 에드먼드 씨의 머릿속을 알 순 없지만, 아마 그건 리안 씨가 선택한 삶을 존중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내 삶을 존중하고 싶었다고요?”

“네, 간혹 자신이 아프다는 걸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은 가족들이 자신을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행동을 했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에드먼드 씨도 자신의 감정이 리안 씨의 앞날에 짐이 되거나 발목을 잡는 일이 안 되기를 바라셨을 거예요.”

웬디의 새로운 해석에, 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에디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속이 더 다정한 사람이니까요.”

리안은 웬디의 시선을 피해 별채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미련했네요. 에디는 나를 배려하느라 입을 다물고, 나는 그 침묵을 미움인 줄 알고 발을 돌리고, 우리는 계속 엇갈린 마음만 붙잡고 있었던 거군요.”

리안의 자책 섞인 목소리에, 웬디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그녀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중요한 건 지금 이렇게 오셨다는 거죠! 늦었더라도 도착했다면 된 거 아닐까요? 리안 씨를 향한 등대의 빛이 방금 닿은 셈이죠.”

웬디의 다정한 말에 리안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고마워요, 웬디 씨.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영영 이 문턱을 넘지 못했을 거예요. 당신의 초대장은 내 영혼을 비추는 등대였네요.”

웬디는 거창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칭찬에 볼을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곧이어 리안은 웬디의 안내를 따라 본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식당에서 나오던 마가렛은 리안을 발견하자마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세상에나! 리안? 정말 리안이니?”

마찬가지로 마가렛을 발견한 리안이 아이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마가렛 아주머니. 학교에서 아주머니가 해주시던 수프 냄새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오, 이런! 정말 리안이구나.”

마가렛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곧 웬디의 시선이 집무실로 향한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향한 반가움은 아마 자신보다 수십 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누군가가 더욱 클 테니 말이다.

웬디는 리안을 데리고 에드먼드의 집무실로 들어갔지만, 에드먼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집무실 한쪽, 화원으로 향하는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웬디는 육중한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화원으로 발을 들였다. 역시나 에드먼드는 철제 테이블 근처에 난 잡초를 뽑으며 화원 관리에 한창이었다.


“에드먼드 씨!”

“잠시만 기다리게! 금방 나갈 테니까!”

웬디의 부름에 에드먼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손님이 오셨어요!”

“이 시간에 예약된 손님이 없을 텐데? 또 길 잃은 손님이라도 찾아온 건가?”

에드먼드는 의아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돌아본 그의 시선이 웬디의 옆에 있는 리안에게 닿는 순간, 화원의 모든 소음이 마법처럼 잦아들었다. 에드먼드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굳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환상인지, 혹은 그리움이 빚어낸 백일몽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묘한 침묵을 깬 것은 리안이었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해 온 노란 꽃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에드먼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 에디? 내가 조금 늦었지?”

그 짧은 애칭은 에드먼드의 무뚝뚝한 가면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너는 늘 늦었어. 한 번도 제시간에 온 적이 없지.”

잔뜩 잠긴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억눌린 것처럼 터져 나왔다. 그의 표정도 짐짓 험악했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간 삭여온 그리움이 녹아 있었다. 리안은 자연스럽게 철제 테이블 앞에 멈춰 서서 에드먼드가 매일 닦아두었을 섬세한 꽃무늬 찻잔 옆에 가져온 꽃을 내려놓았다.


“웬디 씨가 보내준 초대장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리안이 화원 입구에 서 있던 웬디를 바라보며 말하자, 에드먼드의 시선 역시 그녀에게 향했다. 그제야 리안이 이곳에 나타난 경위를 눈치챈 그의 눈빛에는 당혹감과 원망, 그리고 감사까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감정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다. 애틋한 눈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보던 리안은 맞은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마치 어제도 이곳에서 차를 마신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녀는 온기가 없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에디, 차를 내어줄 수 있을까? 오랜만에 너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에드먼드는 그런 리안을 바라보다 짧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빈 찻주전자 속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물이 채워졌다. 리안의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따라준 에드먼드는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웬디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용히 화원의 문을 닫았다. 집무실 밖에서 눈가를 훔치며 서 있는 마가렛을 발견한 웬디는 얼른 달려가 그녀를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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