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안녕, 나의 네버랜드 (1)

by 달빛타래

“웬디, 혹시 이곳을 떠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네?”

아침 식사 후, 화원에서 단란한 티타임을 가지던 웬디는 뜬금없이 나온 에드먼드의 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웬디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이 빠르게 나열됐다.


‘혹시 지나가다 모르고 꽃을 밟았나? 아니면 손님의 예약 날짜를 헷갈렸나?’

웬디는 서둘러 에드먼드의 심기를 거슬릴 만한 것들이 있었는지 고민했다. 에드먼드는 갑자기 심각해진 웬디의 표정을 보고는 재차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를 문책하거나 여기에서 내쫓으려는 의도로 묻는 게 아니라네.”

웬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시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군.”

에드먼드는 낮은 목소리로 웃자,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작게 생겼다. 리안과 재회한 날, 에드먼드는 화원에서 하루를 꼬박 새워가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 리안은 에드먼드의 설득으로 며칠 동안 별채를 옮겨가며 산장에 머물렀고, 오랜 이별이 무색할 만큼 둘 사이의 어색함은 하루가 다르게 흐려졌다. 두 사람의 재회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에드먼드의 주위를 감돌던 분위기가 몰라보게 부드러워졌다는 점이다. 예전의 그는 손님들에게 친절하면서도 어딘가 무뚝뚝한 소나무 같았다면, 지금은 햇볕을 듬뿍 받아 유순해진 정원수처럼 느껴졌다. 물론 에드먼드를 오랫동안 봤던 펠과 마가렛의 시선에서는 제법 큰 변화였는지 연신 놀란 표정을 짓곤 했다.


“자네 덕분에 리안과 재회할 수 있었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나조차 잊고 있던 꿈을 자네가 되찾아 준 걸세.”

에드먼드는 홍차가 든 찻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묻는 거라네. 만약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여건이 안 되어 포기했거나 이루고픈 꿈이 있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지.”

“꿈, 이요?”

웬디는 생경하게 느껴지는 단어에 애매모호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 꿈은 백화점 쇼윈도 속 사치품처럼 다른 세상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지 않고, 무례한 손님들의 고함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그저 무탈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것. 그것이 과거의 웬디가 바랐던 소박한 꿈이었다.


“저는 그냥 여기서 별채를 정리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제가 뭘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웬디는 우물쭈물 그렇게 답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소극적이고 맥이 빠지는 대답이지만, 에드먼드는 실망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그동안 오지랖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남의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자네 덕분에 웃으며 산장을 떠난 손님도 제법 늘었고.”

에드먼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지나가듯 말했다. 거창한 수식어는 없지만, 칭찬에 인색한 그가 한 말이기에 더욱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민망한 기분에 고개를 숙인 웬디는 찻잔에 일렁이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제가 게을러서 그런지 매일 퇴근 시간만 기다리다가, 막상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요.”

“그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단지 여유가 없었을 뿐이라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한 번 찾아보게. 자네가 진심으로 도달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에드먼드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흔쾌히 말했다. 짧은 티타임이 끝난 후, 웬디는 다소 멍한 얼굴로 화원을 나왔다. 에드먼드의 말은 잔잔했던 웬디의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본관 복도를 걷는 내내, 웬디의 머릿속에는 꿈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렸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웬디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 이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고민했다. 그동안 그녀가 배운 기술이라곤 창고 재고를 정리하는 방법과 장부 속 숫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들로 이 산장에서 활약할 일은 적었고, 그마저도 시간이 제법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웬디는 에드먼드가 던진 꿈이라는 단어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줄 수 있는 질문에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에드먼드 씨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

멍하니 서 있던 웬디는 양쪽 뺨을 가볍게 짝 쳤다. 정신을 차리니, 코끝으로 고소한 빵 냄새가 흘러왔다. 복잡한 생각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일상적인 냄새에 웬디는 이끌리듯 마가렛의 주방으로 향했다.


“마가렛!”

“어서 오렴, 웬디.”

마가렛은 커다란 나무 볼을 앞에 두고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주름진 그녀의 손이 반죽을 누르고 당길 때마다 철썩거리는 묵직한 소리가 리듬감 있게 울렸다.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손님들 식사에 올라갈 빵을 만드는 참인데, 시간이 괜찮으면 같이 반죽을 만져주겠니?”

“그럼요!”

웬디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마가렛의 옆에 섰다. 말랑말랑하고 온기를 머금은 반죽을 일정한 힘으로 누르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 웬디는 마가렛을 따라 반죽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마가렛,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말하려무나.”

“마가렛의 꿈은 뭔가요?”

마가렛은 손을 멈추지 않고 눈만 움직여 웬디를 바라봤다. 찰나의 시선이었지만, 마가렛은 웬디의 얼굴에 스민 고민을 눈치챘는지 미소를 지었다.


“내 나이가 되면 꿈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참 쑥스럽구나.”

“에이, 마가렛처럼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넉살을 부리는 웬디의 모습에 마가렛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말하자면, 내 꿈은 지금처럼 사는 거란다.”

“지금처럼요?”

웬디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꿈이라는 대답은 무언가 대단한 목적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녀에게 사뭇 낯설게 다가왔다.


“물론 나도 젊을 때는 욕심이 많았지. 왕실 식당에서 여러 요리사를 거느리는 주방장이 되거나, 사람들이 앞다퉈 찾아보는 요리책을 쓰고 싶었어.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바뀌더구나.”

마가렛은 요리용 붓을 꺼내 모양을 잡은 반죽 위에 달걀노른자를 덧칠했다. 윤기가 흐르는 반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보석을 세공하는 장인처럼 진지했다.


“언젠가부터 산장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식사 한 접시 내어주고, 배를 든든히 채워서 내보내는 게 가장 큰 기쁨이더구나. 그때부터 내 꿈은 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행복해지는 걸로 바뀌었어.”

두 사람이 함께 완성한 반죽은 미리 데워진 오븐 안으로 들어갔다. 일하는 동안 수만 번도 본 광경일 테지만, 오븐을 들여다보는 마가렛의 눈동자에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 엿보였다. 조만간 부풀어 오르고 노릇하게 구워질 빵을 기다리는 그 순간이 그녀에게는 크나큰 설렘인 셈이었다.


‘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행복해지는 것.’

웬디는 주방에 퍼지는 고소한 향기를 맡으며 그 말을 나직이 곱씹었다. 누군가에게는 정체된 삶처럼 보일지라도, 마가렛의 꿈은 매일 이 주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방을 나온 웬디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서재로 향했다. 마가렛의 대답을 듣고 나니, 산장의 다른 식구들의 꿈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서재 너머에서는 사각사각 종이를 스치는 펜촉 소리가 들려왔다. 펠이 장부를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펠, 바빠?”

웬디가 문을 가볍게 노크하며 들어가자, 제 몸집보다 높게 쌓인 장부 사이에 파묻혀 있던 펠이 고개를 들었다.

“까악! 오늘도 새로운 책을 빌리러 온 거야?”

“오늘은 책 말고 펠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혹시 펠은 꿈이 있어?”

“내 꿈?”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펠의 고개가 좌우로 크게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발에 쥔 깃펜을 책상 위에 놓고는, 초록색 날개를 활짝 펼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내 꿈은 이미 정해져 있지! 나는 완벽한 까마귀가 되는 게 꿈이다! 까악!”

“완벽한 까마귀?”

웬디는 그동안 펠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소리가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펠은 장난기가 많기는 해도, 엄연히 산장의 돈과 세금을 관리하는 박식한 회계사였다. 그런 그가 누가 봐도 초록색인 깃털과 붉은 부리를 가진 모란앵무의 몸으로 까마귀를 꿈꾼다는 건 다소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어?”

“까악! 당연하지! 나는 늘 진심만을 말하는 새거든!”

“그렇지만 펠, 너는 앵무새잖아. 앵무새가 까마귀가 되는 건,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아?”

웬디는 펠의 기분이 상할까 할 말을 고민하다 간신히 ‘생물학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정작 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가슴을 폈다.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다! 누가 나를 앵무새라고 정의하는 건 관심 없어! 나는 이미 나 자신을 고결한 까마귀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근데 왜 하필 까마귀야? 너에겐 까마귀에게 없는 예쁜 깃털이 있잖아.”

그 말에 펠은 머리를 숙여 자신의 털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내 깃털 색을 좋아하지 않아, 웬디.”

갑자기 진지해진 펠의 목소리에 웬디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펠은 부리로 초록색 깃털을 신경질적으로 고르더니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렸다.


“옛날에 나는 아주 형편없는 인간들이 운영하는 서커스단에서 자랐어.”

펠은 창밖으로 보이는 숲을 응시하며 과거사를 꺼냈다. 싸구려 좌석과 녹이 슨 조명, 술에 취한 관객과 조롱과 비난이 일상인 엉망진창인 시골 마을의 무대. 펠은 썩은 사과 냄새가 진동하는 창고의 좁은 새장에서 자랐다. 단원들은 새장에 갇힌 펠에게 술에 취한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욕지거리만 골라서 가르쳤다. 어차피 그들에게 펠은 화려한 깃털을 가진 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 마음이 어떤지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어. 그저 우스꽝스럽게 재롱을 부리는지 감시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길쭉한 꼬챙이로 내 몸을 찔러댔지. 수입이 적은 날엔 아예 밥도 주지 않고 하루 종일 굶기기도 했어.”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는 펠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늘 장난기 넘치는 모습 뒤에는 웬디가 알지 못했던 깊은 외로움과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힘든 시절을 견뎠구나, 펠. 정말 고생 많았어.”

웬디는 간신히 그런 말을 내뱉었다. 펠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나를 꺼내준 게 주인장이야. 다른 사람들은 내 깃털이 예쁘다느니, 말을 잘한다느니 떠들어댔지만, 주인장은 내가 얼마나 셈이 빠르고 꼼꼼한지 한눈엥 알아봐 줬지.”

펠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 다시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나를 재롱부리는 새가 아니라 동료로 대해준 건 주인장이 처음이었지. 심지어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산장의 장부를 맡기기까지 했어!”

펠은 한번 보라는 듯 자신이 정리하던 장부를 발로 툭툭 쳤다. 거기에는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깔끔한 필체로 이루어진 문장이 가득했다.


“펠은 나보다 글씨를 잘 쓰는 것 같네.”

“이렇게 쓰기 위해서 쉬지 않고 노력했으니까.”

웬디는 펠의 발 크기에 맞춤으로 제작된 깃펜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람이 쓰기에도 불편한 깃펜을 조그만 발로 움켜쥐고, 잉크가 번지지 않게 힘을 조절하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까지 얼마나 긴 인내의 시간을 감내했을까. 요란한 음악과 비릿한 악취투성이인 과거를 떨쳐내기 위해 펠이 얼마나 많은 밤을 이 책상 앞에서 보냈을지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가슴이 찡해졌다. 어쩌면 펠에게 있어 이 장부들은 단순한 일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재롱을 부리는 광대에서 산장의 식구로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어쨌든, 나는 주인장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까마귀가 되기로 했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

“맞아.”

펠은 짐짓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까마귀는 늙은 부모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은혜를 잊지 않는 새라고 했어! 그걸 알고 나서 나는 태생을 부정하고 까마귀가 되기로 했지! 이 산장의 까마귀로 남아 주인장에게 입은 은혜를 갚는 것! 그게 내 꿈이야!”

펠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 깃펜을 발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자씩 글자를 써 내려가며 말했다.


“앵무새로 태어난 건 내가 정한 게 아니지만, 까마귀로 살기로 한 건 내 선택이야. 그러니 웬디, 너도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사각거리는 분주한 깃펜 소리가 들리자, 웬디는 펠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뒷걸음질로 서재를 나섰다. 펠의 마지막 말은 웬디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다.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그 억지스러운 선언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그녀보다 훨씬 자유롭고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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