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안녕, 나의 네버랜드 (2)

by 달빛타래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웬디는 펠이 남긴 말을 읊조리며 자연스레 가을 별채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가렛과 펠을 이어, 산장 식구 중 가장 게으른 친구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단풍잎이 가득 쌓인 가을 별채의 지붕, 밍크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사과 조각을 양손에 쥐고 야무지게 갉아먹고 있었다. 웬디는 밍크가 잘 보이는 바위 옆에 걸터앉아 물었다.


“맛있어, 밍크?”

밍크는 대답도 귀찮다는 듯 눈만 슬쩍 뜨고 웬디를 흘겨보았다. 입안에 든 사과 조각을 잘게 씹어 삼킨 밍크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밍크는 무언가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

“뭐?”

밍크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되묻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


“난 그런 복잡한 건 몰라. 배부르고 햇볕이 따뜻하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 상관없으니까.”

역시나 밍크다운 태평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웬디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밍크의 입가에 붙은 사과 껍질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도 꿈이 있으면 삶이 더 특별해질 수도 있잖아.”

밍크는 가늘게 뜬 눈으로 웬디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밍크의 레몬색 눈동자에는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밍크는 꼬리를 위로 세운 채 웬디가 앉은 바위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면 반대로 물어보자. 꿈이 없으면 내가 먹는 사과의 맛이 사라지거나 햇빛이 차가워지기라도 해?”

“그건 아니겠지.”

“오히려 나는 앞날을 걱정하느라 사과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는 게 더 멍청이 같은데?”

웬디는 그 말에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밍크에게 있어 삶이란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얻게 될 보상이 아니라, 이 순간 입안을 채우는 사과의 단맛과 등을 데우는 따스한 햇살, 그 자체였다. 돌이켜 보면, 웬디 또한 매달 빠져나가는 생활비를 걱정하느라, 식감이 최악에 가까운 싸구려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 날이 많았다. 여유가 없으니 예기치 못한 지출에 예민해지고, 자신을 위한 소비가 과한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밍크는 상념에 빠진 웬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넌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이곳에 온 첫날도 쉬는 것보다 일자리부터 구하려 했지.”

“응, 그랬지.”

웬디는 민망한 마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초면인 에드먼드에게 대뜸 일자리를 부탁한 건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아. 덕분에 이곳에서 많은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러면 된 거야. 우리가 단순하게 살든, 복잡하게 살든, 세상은 흘러가. 그러니 억지로 헤엄치지 말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밍크는 그렇게 말하며 발라당 몸을 뒤집었다. 웬디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런 밍크의 목과 옆구리를 살살 긁어줬다. 손길이 만족스러웠는지 눈매가 반달처럼 휘는 밍크를 보며 웬디는 그가 말한 단순함에 대해 떠올렸다. 해가 자리를 옮기며 별채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무렵, 밍크가 만족스러운 듯 몸을 다시 뒤집더니, 그 자리에서 나른한 단잠에 빠졌다. 웬디는 밍크가 깨지 않도록 까치발을 들며 헨리가 머무는 초원으로 향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덕분에 초원의 시야는 탁 트였고, 그 중앙에는 겨울 하늘을 고스란히 담은 호수가 보였다. 그 평화로운 풍경의 중심에는 호숫가에 서 있는 헨리가 있었다.

평소에는 누군가 초원에 접근하기만 해도 눈치채던 헨리는 사색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웬디는 헨리의 고요를 깨지 않으려 초원을 조심스럽게 가로질렀다. 거리가 스무 걸음 정도로 좁혀지자, 그제야 헨리가 웬디를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웬디 양,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네, 헨리는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헨리는 낮게 웃으며 웬디를 향해 머리를 살짝 숙였다. 웬디는 그의 길쭉한 콧등을 가볍게 문지르는 것으로 둘만의 인사를 나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요?”

“지나간 영광에 대한 사색이랄까요.”

헨리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예전에 트랙을 질주하는 경주마 출신이라고 소개한 것 기억나십니까?”

“기억나요. 처음 인사를 나누는 날 헨리가 알려줬었죠.”

웬디는 경기장을 치열하게 내달리는 헨리의 모습을 그려봤지만, 사뭇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헨리가 타인에게 정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더욱 그랬다.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수천 명이 보는 경기에서도 두 차례나 우승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것만이 제 삶의 전부인 줄 알았죠. 그래서 새벽부터 이어지는 고된 훈련도, 발굽이 갈라지는 통증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분명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과거임에도, 헨리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승리의 환호성과 꽃다발 이면에는 외로운 헨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전 주인이 세상을 떠나고 마구간에 홀로 남겨졌을 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최고의 경주마가 되는 건 제 꿈이 아니라, 주인의 욕심이라는 사실을요.”

헨리는 깨달았다. 그는 남들과 경쟁하듯 경기장을 달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주인의 바람대로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고, 우연히 성적이 좋았을 뿐이었다. 주인이 사라진 헨리는 많은 이들이 앞다퉈 소유하려 들었다. 아직 현역이고 우승 경험까지 있는 경주마는 누구든 탐내는 말이었다. 그러나 삶의 의욕을 잃은 헨리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경주마의 건강이 나빠지자,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발길을 돌렸다.


“근처를 지나가던 에드먼드 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에드먼드 경은 저를 이곳에 데려올 당시, 처음 꺼낸 말이 기억나네요.”

헨리는 에드먼드가 있을 본관 방향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더는 달리지 않아도 된다네. 여기서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에드먼드 씨답네요.”

웬디는 무심한 듯 배려가 느껴지는 에드먼드의 말투가 들리는 것 같아 풋 웃었다. 헨리도 마찬가지였는지 발을 가볍게 구르며 즐거워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의 자랑이 되기 위해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걸요.”

영광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할 때 가장 빛난다며, 헨리는 덧붙였다.


“누군가에게는 제 삶이 정지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헨리는 고개를 돌려 웬디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말간 눈동자에는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멈춰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 *


늦은 저녁, 일과를 마친 웬디는 평소처럼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에드먼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에드먼드는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김이 올라오는 찻주전자로 보아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머문 듯했다. 웬디는 집무실에 은은하게 채운 홍차의 향기를 맡으며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두 발로 돌아다니며 들은 산장 식구들의 꿈은 저마다 달랐다. 마가렛의 꿈은 일상이었고, 펠에겐 은혜를 갚기 위한 결심이었으며, 밍크에겐 현재였고, 마지막으로 헨리에게는 자유였다. 웬디는 자신만의 방향을 아는 식구들이 신기한 동시에 부러웠다. 여전히 그녀의 꿈은 숲의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했고 나아갈 방향을 모르고 서성거렸다.


한숨을 푹 내쉬던 웬디는 문득 책상 한구석에 정갈하게 쌓인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새해를 앞두고 손님들을 위해 에드먼드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적었던 감사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서둘러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집무실에 울렸다. 웬디는 가장 위에 놓인 봉투부터 집어 들었다.


첫 번째 편지는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봉하는 인장에 큼지막하게 찍힌 ‘W’ 마크 덕분이었다. 보라색 봉투를 열자, 코코가 산장을 방문할 당시 뿌린 부드러운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안녕, 파트너. 잘 지내고 있나요?

당신이 편지에 동봉해 준 버섯 요리 레시피 덕분에 이번 겨울은 꽤 따뜻하게 보내고 있어요. 완성된 요리에서 풍미가 깊게 느껴지는 걸 보니, 제법 전통이 깊은 요리인 모양이네요. 어쩌면 지나갈 인연으로 여길 수도 있는데, 나의 사소한 식성까지 기억해서 편지를 써준 당신에게 큰 감사를 보내요.

조만간 ‘자연과 순환’을 테마로 한 패션위크가 열릴 예정이에요. 봉투 속에 내 서명이 포함된 초대장을 동봉했으니, 바쁘지 않다면 참석해 줬으면 해요.]


편지 뒤쪽에 붙은 초대장에는 코코 와일드라는 이름이 세련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웬디는 초대장을 꼭 쥔 채 미소를 지었다. 편지를 쓸 당시, 웬디는 코코가 다시 삶을 권태롭게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다 떠올린 생각이 그녀가 산장을 방문했던 날, 같이 먹었던 하얀 버섯 요리였고, 곧바로 마가렛에게 부탁해 레시피를 받아왔다.

두 번째 편지의 주인은 크로노스 마법학교의 천재 소년, 에반이었다. 빳빳한 편지 위에 적힌 글씨는 열네 살 소년이 썼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반듯했다.


[웬디 씨에게,

제가 살면서 편지를 써본 적이 없어서, 내용이 엉망진창이라도 이해해 주세요.

웬디 씨가 편지를 보내주실 거라고 상상하지 못해서 조금 놀랐어요. 웬디 씨가 친절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저는 그러니까 불청객,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저를 기억해 주시고 편지를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보내주신 편지는 제 기숙사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있어요. 편지에 적힌 모든 말이 좋았지만, 특히 마지막에 ‘서두르지 않아도 계절은 온다’에요. 배우는 내용이 복잡해 머리가 아플 때 그 문장을 보면, 밍크의 털을 빗겨주던 일과 헨리의 등에 올라타 초원을 내달리던 기억이 떠오르거든요. 웬디 씨가 쓰는 편지에는 특별한 힘 있는 것 같아요. 마법사들의 주문보다 더 따뜻한 힘이요.

내일 시험이 있어서 편지는 짧게 마칠게요. 이번 시험 결과가 좋으면 고등부 3학년으로 진급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혹시 편지를 받게 되면 시험 결과가 잘 나오도록 기도해 주세요!]


편지를 읽은 웬디의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의 재능에 짓눌려 숨 가쁘게 달리기만 하던 소년이 그녀가 쓴 문장을 보며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말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만약 에반이 옆에 있다면,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때까지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다음 편지의 주인은 웬디가 개인적으로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바로 도플갱어가 되어 산장에 도착했던 앨리스였다.


[안녕하세요, 웬디.

산장 일로 바쁜 와중에 이렇게 편지까지 보내줘서 고마워요. 안 그래도 웬디에게 알려주고 싶은 기쁜 소식이 있어요. 저 정식 연극 오디션에 합격했어요. 비록 주연은 아니고 조연에 가깝지만, 그래도 재연배우를 벗어나 처음으로 맡는 역할이라 마음이 떨려요. 처음으로 누군가의 대역이 아닌, 내 해석이 깃든 인물의 목소리를 낸다는 게 이렇게 무거운 일인 줄 처음 알았어요.

새로운 무대에 선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칠 만큼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일이 기대되는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이 모든 건 웬디가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덕분이에요. 나중에 연극 날짜가 확정되는 날, 제 사비로 구매해서라도 티켓을 보낼게요.]


“정말 잘됐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웬디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 또한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어대고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점차 이름을 잃어가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앨리스의 걱정이 누구보다 격하게 공감되었다. 웬디는 세상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박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 모두 이뤄지기를 바랐다. 이후로도 웬디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손님들의 답장 편지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꼼꼼히 읽었다. 그러다 문득 웬디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어?”

자기도 모르게 손등 위로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웬디는 편지를 내려놓고 얼굴을 가렸다.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바쁘게 일을 하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충만함 때문이었다. 웬디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물건을 빠르게 정리하거나 숫자를 빠르게 정산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행복을 함께 바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아픔에 기꺼이 함께 들어가고,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작은 빛이라도 찾아내어 건네주는 과정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다시 웃으며 산장 문을 나설 때 비로소 그녀 또한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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