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안녕, 나의 네버랜드 (3) -完-

by 달빛타래

손등에 떨어진 눈물이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에도 웬디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때, 문 앞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에드먼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웬디는 황급히 눈가를 훔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웬디, 이 밤중에 여기서... 아니, 자네 왜 울고 있나?”

에드먼드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아, 죄송해요. 그냥 손님들의 편지를 읽다가 조금 울컥해서요.”

웬디가 젖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편지 뭉치를 가리켰다. 에드먼드는 그제야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손님들의 답장을 확인했다. 그는 작게 안도하며 완전히 식은 찻주전자를 다시 데웠다.


“울고 싶으면 편할 만큼 울게나.”

곧바로 따뜻한 홍차 한 잔이 웬디의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바라보던 웬디는 숨을 고르고는 에드먼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에는 꿈을 찾아야만 한다는 조급함 대신,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웬디는 자신이 품어왔던 막연한 불안이 이 편지들을 통해 선명한 길로 변했음을 느꼈다.


“에드먼드 씨, 저 산장을 떠나려고 해요.”

자신의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던 에드먼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상상치도 못한 발언에 깜짝 놀란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정적이 집무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떠나겠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이곳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나? 아니면 요즘 일감이 너무 많았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에드먼드의 모습에, 웬디는 오전 티타임 때의 제 표정이 꼭 저랬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그리고 영영 이 산장을 떠난다는 뜻도 아니에요. 저, 제대로 배우고 싶은 게 생겼어요.”

“배우고 싶은 것이라.”

웬디의 말을 되짚던 에드먼드의 눈동자 위로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웬디는 책상 위의 편지들을 소중하게 모아 쥐며 말을 이었다.


“이 편지들을 읽으며 깨달았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누군가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다시 웃을 수 있게 돕는 일이에요. 그걸 꿈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 오지랖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자네가 그것을 원한다면 당연히 꿈이라고 말해도 된다네. 그런데 그것과 산장을 떠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나?”

“이곳에 마침 리안 씨가 계시니까요.”

갑작스러운 리안의 언급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에드먼드는 이내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듯 눈썹을 꿈틀했다.


“리안이 운영하는 심리 상담소 때문인가?”

“맞아요. 그분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상담하는 전문가니까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면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요.”

에드먼드는 확신에 찬 듯한 웬디의 눈빛과 그녀의 손에 쥐어진 편지 뭉치들을 번갈아 보았다.


“흠.”

겨우 숨소리일 뿐인데도, 웬디는 숨을 죽인 채 에드먼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별채 쪽으로 이어진 창문을 힐끗 쳐다본 에드먼드는 다시 웬디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에드먼드의 입가에 옅고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본 이가 보낼 수 있는 진심 어린 축복이었다.


“자네의 그 요란스러운 오지랖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모양이군.”

“정말 감사해요, 에드먼드 씨!”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네. 그보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지금 당장 가서 결판을 짓는 게 좋겠군.”

“시간이 없다고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안이 내일 이곳을 떠날 예정이라서 말이야. 그녀도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에드먼드는 손을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웬디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리안이 머무는 가을 별채로 향했다. 에드먼드가 별채의 문을 세 번, 규칙적으로 두드리자,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갈색 가디건을 어깨에 걸친 차림으로 나타난 리안은 예고도 없이 방문한 두 사람을 보며 의아한 기색이었다.


“에디? 웬디 씨?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요?”

“웬디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죠. 특히 웬디 씨라면요.”

호감이 물씬 배어 나오는 리안의 대답에, 웬디는 긴장한 얼굴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을 꼭 붙잡으며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리안 씨에게 정식으로 상담 일을 배우고 싶어요.”

“... 그렇군요.”

리안은 예상치 못한 부탁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차분한 눈빛으로 웬디의 눈을 응시했다.


“웬디 씨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 깊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겠죠. 하지만 웬디 씨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어떤 건가요?”

“누군가를 상담하는 일은 마냥 다정하고 아름다운 치유의 과정이 아니에요. 오히려 타인의 어두운 감정을 기꺼이 뒤지는 일이죠. 썩어 문드러진 마음과 억눌린 원망,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우울함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일이에요. 그동안 나는 선의로 상담 일을 시작했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선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리안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경고는 웬디가 가진 막연한 동경을 부수려는 것처럼 매서웠다. 웬디는 침을 꿀꺽 삼켰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리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하지만 오늘 손님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넘어진 누군가에게 다시 일어설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그건 나를 갉아먹는 일이 아니라 채워주는 일이 될 거라고요. 리안 씨 말씀대로 앞으로 상처받는 일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웬디는 잠깐 말을 멈추고 에드먼드를 흘끗 바라봤다.


“이곳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괜찮을 거예요.”

웬디의 얼굴에는 몇 달 전까지 죽은 눈으로 일만 하던 누군가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열의가 가득했다. 리안은 그런 웬디의 결심을 깨닫고 부드럽게 웃었다.


“좋아요. 웬디 씨의 의지가 그렇다면 저도 말리지 않을게요. 대신 상담사가 아닌 선생으로서 저는 아주 깐깐할 테니,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웬디는 리안이 말릴 때까지 몇 번이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별채에서 돌아온 웬디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코코에게 받은 목걸이와 초대장, 멜로우에게 받은 진주, 그 외 산장을 방문했던 손님들이 남기고 간 명함 등이 담겨 있었다.


소중한 흔적들을 어떻게 챙겨갈지 고민하던 웬디는 챙겨왔던 가방을 떠올렸다. 옷장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을 꺼내 지퍼를 연 웬디가 잠깐 멈칫했다. 곧 그녀의 손에 반으로 접힌 종이가 잡혔다. 바로 웬디가 집에서 챙겨왔던 이력서였다. 이력서에 적힌 잡다한 글을 한참 바라보던 웬디는 종이 끝을 두 손으로 잡고 찢으려다, 이내 생각을 바꿔 가방 안에 얌전히 넣었다. 행복하지 않은 날도 많았지만, 예전의 기억들은 결국 그녀를 이루는 하나의 문장이었다. 웬디는 반으로 접은 이력서 위에 물건들이 엉키지 않도록 차곡차곡 챙겼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베개 아래에 숨겨둔 엄마의 초대장을 꺼냈다. 모든 일의 시작이자, 이 신비로운 산장으로 인도했던 유일한 흔적이었다. 웬디는 눈을 감고 초대장에 밴 은은한 꽃향기를 맡았다.


“엄마, 나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찾았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켜봐 줘.”


* *


다음 날 아침, 새벽안개가 물러난 숲은 유독 화창한 햇살을 머금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유리처럼 반짝여 웬디의 새로운 출발을 환영하는 듯했다. 처음 산장을 방문했던 옷을 입고 1층에 내려온 웬디는 현관에 서 있는 에드먼드를 발견했다. 그는 괘종시계의 태엽에 쌓인 사소한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

“에드먼드 씨, 제가 쓰던 방의 이불을 세탁실에 뒀어요. 창고의 물건 목록을 정리한 종이도 입구에 붙여놨고...”

웬디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자기 전까지 했던 일들을 나열하자, 에드먼드는 손을 내저었다.


“그만 말해도 된다네. 자네가 오기 전까진 나 혼자서 일했다는 걸 잊었나?”

웬디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갑자기 정든 곳을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괜히 복잡하네요.”

“복잡할 일 없네. 누구에게나 크거나 작은 이별의 순간이 온다네.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지.”

에드먼드는 훈계하듯 말했지만, 웬디는 이제 그의 말 속에 감춰진 작은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없다고 차만 드시고 식사 거르지 마세요. 혼자 계신다고 끼니를 대충 드시는 것도 안 돼요.”

“나를 애 취급할 생각인가? 와서 이거나 받게.”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던 에드먼드는 조끼 안쪽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그동안 여기에서 일한 것에 대한 급여와 퇴직금을 넣은 통장이라네. 리안의 상담소에서 몇 블럭 벗어난 거리에 있는 은행에서 사용하면 될 걸세.”

“에드먼드 씨.”

“그렇게 감동한 얼굴 하지 말게. 자네는 충분히 할 일을 했고, 이건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일 뿐이니까.”

에드먼드는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가 베푼 수많은 친절이 떠오른 웬디는 괜히 감정이 북받쳤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돌이켜보니 에드먼드 씨는 제게 피터 팬 같은 존재였나 봐요.”

웬디의 뜬금없는 비유에 에드먼드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피터 팬이라면, 동화 속에 나오는 철없는 요정 놈을 말하는 건가?”

“아니요. 저를 네버랜드 같은 이곳에 초대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지켜봐 준 사람이니까요. 에드먼드 씨 덕분에 저도 모르던 상처를 회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어요.”

“내가 한 게 뭐가 있나? 잠깐 지쳤다 쉰 자네가 스스로 일어났을 뿐이지.”

“그래도 그 쉼터를 제공한 건 에드먼드 씨니까요. 정말로 감사해요.”

웬디의 진심 어린 말에 에드먼드는 결국 항복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여긴 네버랜드가 아니니, 언제든지 찾아오고 싶으면 오게나. 어차피 자네 방은 원래도 비워두던 곳이니까. 안 되면 빈 별채라도 빌려주지.”

다정한 대답에 웬디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놀랍게도 산장의 식구들이 모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가렛은 한 손으로 못 들 만큼 큰 쿠키 상자를 웬디의 손에 쥐여줬다.


“일이 힘들고 지칠 때는 주저하지 말고 이 쿠키를 꺼내 먹으렴. 제프에게서 구한 특별한 재료를 넣어서 활력이 생길 거란다.”

“고마워요, 마가렛.”

웬디는 마가렛을 살포시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까악! 이거 받아라!”

펠은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형형색색의 꽃다발을 발에 쥐고 웬디의 목에 걸어주었고,


“지금의 아쉬움은 우리의 유대감이 얼마나 깊었는지 나타내는 증표겠지요. 언젠가 만날 날을 기대하며 웬디 양의 앞날을 축복하겠습니다.”

헨리는 격식 있게 웬디의 앞날을 축복했으며, 밍크는 조용히 웬디의 발목에 몸을 비비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쉬움을 전했다. 모두의 배웅을 받은 웬디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리안의 곁으로 걸어갔다. 에드먼드는 리안에게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리안은 그런 에드먼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모두의 응원 속에서 두 사람은 산장을 뒤로 하고 숲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숲의 결계와 이어진 입구에서 웬디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숲의 품에 안긴 산장의 전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평화로웠다. 그때,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숲 전체가 부드럽게 술렁였다. 나뭇잎이 자기들끼리 닿으며 스르르 소리를 냈고, 발치에 핀 야생화들은 모두 해가 아닌 웬디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은 숲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배웅이었다. 웬디는 가슴 한구석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이끌어 준 초록빛 안식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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