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는 한동안 거친 숨소리와 흙을 긁어내는 소리로 가득했다. 웬디는 산장에서 챙겨온 낡은 삽을 양손으로 꽉 쥐고, 호수 밑바닥에 난 이끼를 퍼냈다. 삽날이 지면을 파고들 때마다 서걱거리는 기분 나쁜 소름이 웬디의 팔꿈치를 타고 전해졌다. 앞치마는 이미 흙투성이에 팔근육이 뻐근했지만, 산장의 풍경과 요정들의 집을 되찾아 주겠다는 일념으로 정성껏 이끼를 없앴다.
멜로우와 머피 남매 또한 필사적이었다. 두 요정은 변덕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거둔 채, 돌 틈 사이에 낀 작은 이끼 조각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손끝에 닿은 이끼에서 분홍색 포자가 미세하게 흩날리며 진동을 내뿜었지만, 요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루에 차곡차곡 담았다. 하나둘씩 쌓이는 무거운 자루들은 헨리가 입으로 물어 초원 멀리 숲의 생명력이 왕성한 장소로 옮겼다.
그 사이, 에드먼드는 집무실에서 간이 책상과 수십 장의 두꺼운 양피지, 그리고 마법 깃펜을 가져와 초원 한복판에 배치했다. 킬리언은 곧바로 의자에 앉아 복잡한 위상 기하학을 써내려갔다. 아까전에 보여주던 히스테릭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킬리언의 눈은 오직 복잡한 수식과 마력의 궤적만을 쫓으며 예리하게 빛났다. 깃펜이 양피지 위를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에드먼드는 수식이 빼곡한 양피지가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고 실시간으로 마력의 흐름을 킬리언에게 알려주었다.
주변이 짙은 군청색으로 물들 무렵, 하늘 위로 밝은 보름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초원을 가득 메웠던 연꽃 향기는 어느덧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눅눅한 습기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대신했다. 저녁 식사도 거른 채 계산에 몰두하고 있던 킬리언은 마침내 안경을 치켜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후! 됐습니다. 이제 보름달이 호수 정중앙에 올 때 이 좌표대로 공간의 문을 여세요!”
킬리언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밤하늘로 향했다. 달은 아주 느릿한 속도로 밤하늘에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웬디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릴 만큼 깊은 적막이 흘렀다. 신기하게도 하루 종일 불어오던 바람도 이 순간만큼은 숨을 멈추듯 불어오지 않았다.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달빛이 점점 초원의 구덩이 위로 쏟아졌다.
에드먼드는 푸른 보석이 윗부분에 박힌 지팡이를 양손으로 꽉 쥐고 땅에 뿌리를 내리듯 굳건히 섰다. 그의 발밑에서는 웬디가 훈장을 통해 봤던 황금빛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킬리언은 줄자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자칫 실수하면 모든 걸 망친다는 부담감을 떠안으면서도 눈은 달의 위치를 부지런히 쫓았다.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써 내려간 수만 개의 숫자가 신비로운 형상을 이루며 회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림 속에 보름달이 마침내 호수 정중앙에 떠오를 때였다.
“지금입니다!”
킬리언의 커다란 목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진 동시에 에드먼드가 지팡이를 땅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찬란한 빛은 킬리언이 지정한 허공의 좌표를 향해 쏘아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색 달빛과 에드먼드의 황금빛 마력이 공중에서 맞물리는 순간, 부드러운 천이 거칠게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공중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쿠우우우우!
그 틈새로 억눌려 있던 수천 톤의 물줄기가 은빛 기둥이 되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공간의 뒷면에 숨겨져 있던 호수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장면은 인간의 상식으로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의 웅장한 위용이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달빛을 반사하며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고, 텅 비어있던 구덩이를 채우며 대지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다만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문제는 엄청난 질량의 물이 한꺼번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물보라가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가장 큰 물줄기는 하필 웬디가 서 있는 방향으로 솟구쳤다.
“어, 어!”
파도처럼 밀려오는 물기둥에, 웬디가 당황한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 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시야가 어지럽게 뒤집히더니, 따뜻한 온기가 몸을 타고 전해졌다. 위기의 순간, 헨리가 웬디의 옷을 물고 고개를 젖혀 자신의 등에 얹은 것이다.
“웬디 양. 꽉 잡으세요!”
웬디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헨리의 갈기를 붙잡았다. 물기둥이 포위하듯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놀라운 운동 신경으로 물기둥을 이리저리 피해 달아났다.
“고마워요, 헨리!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요.”
“별말씀을요.”
웬디는 헨리의 따뜻한 털에 잠시 얼굴을 묻고 숨을 가다듬었다.
“다들 무사한가!”
저 멀리 에드먼드가 큰 소리로 외치며 모두의 안위를 살폈다. 다행히 산장의 식구들과 킬리언은 모두 무사했다. 웬디는 에드먼드를 향해 손을 흔들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그녀의 시선은 호수 주변에서 벌어진 광경에 고정되었다. 구덩이를 가득 채운 호숫물이 달빛을 받아 산산이 부서지면서 초원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물안개가 만들어진 것이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호숫물이 만들어 낸 물안개는 달빛을 투과시키며 무지개색으로 일렁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보석 가루처럼 반짝이며 웬디의 뺨을 간지럽혔다. 무지갯빛 물안개가 세상을 몽환적인 빛으로 물들이는 사이, 달빛을 머금은 호수가 보름달을 품에 안은 채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본 웬디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엄마, 혹시 보고 있어?”
웬디는 시야를 가득 채운 일곱 빛깔의 장막 속에서 다시금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날의 공기는 지금보다 눅눅했고 경관도 예쁘지 않았지만, 뺨을 스치는 물방울보다 따뜻한 손이 있었다.
“웬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야. 물안개가 걷히면 다시 하천이 보이듯, 소중한 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란다.”
사라진 하천에 겁을 먹고 우는 딸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부드럽게 토닥여 주던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호수 위에서 잔잔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엄마는 자신의 곁을 영영 떠난 게 아니라, 잠시 안개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웬디는 엄마가 어디에 있든, 이곳처럼 늘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물안개가 서서히 가라앉고 초원에 정적이 내려앉을 무렵, 킬리언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그는 자신의 로브 자락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는 것도 모른 채 은색 줄자를 흔들었다.
“완벽해! 이토록 심미적으로 완벽한 복구라니! 보름달의 중심축과 호수의 반경이 정확히 황금비를 이루고 있잖아!”
에드먼드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팡이 끝에 맺힌 황금빛 마력은 어느새 초원의 대지 속으로 스며든 상태였다. 웬디는 헨리의 등에서 내려 다시 호숫가로 걸어왔다. 그때, 수면 위에서 두 개의 빛줄기가 화살처럼 솟구쳐 올랐다. 바로 보금자리를 되찾은 요정, 멜로우와 머피였다. 그들은 더 이상 울지 않고, 오히려 기쁨에 겨워 호수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다들 잠깐만 기다려!”
두 요정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물속으로 깊이 잠수했다가 이내 무언가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이건 우리가 주는 선물이야!”
웬디는 멜로우가 손바닥 위에 내려놓은 물건을 내려다봤다. 달빛을 머금어 은은한 은빛을 내는 진주였다.
“호수가 돌아오고 나서 바닥에 있던 진주야. 여기에 우리의 축복을 함께 담았어.”
멜로우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손바닥에 닿은 진주는 분홍색 이끼와는 반대로 잔잔한 진동을 일으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들었다. 웬디는 진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화한 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멜로우.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머피 또한 에드먼드와 킬리언에게 똑같은 진주를 건네며 쑥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멜로우와 머피는 다시 호수의 중앙으로 날아가 수면 위에 발을 딛고 서서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 요정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밤바람을 타고 숲 전체로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잠든 기억은 물결이 되어,
잃어버린 꿈을 다시 불러오네.
달빛 아래 핀 투명한 안개는
그리운 이름을 어루만지네.”
웬디는 멜로우가 선물한 진주를 꼭 쥐며 요정들의 선율에 맞춰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