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마가렛의 식당은 많은 인원으로 인해 북적거렸다. 별채에 손님들이 모두 채워진 기념으로, 에드먼드가 단출한 저녁 파티를 주최한 것이다. 주방에서는 허브와 버터 향이 더해진 스테이크 냄새가 넘실거렸고, 웬디가 정성껏 닦은 유리잔에는 오렌지와 레몬을 비롯한 주스와 얼음이 동동 띄워진 맥주가 담겨 식탁으로 옮겨졌다.
“까악! 고기 냄새가 아주 훌륭하다! 마가렛의 솜씨는 마법이 분명하다!”
펠의 요란한 찬사에 마가렛은 국자를 저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가렛이 솥에서 끓어오르는 단호박 수프를 떠내어 둥근 접시에 담으면, 웬디가 곧바로 접시를 손님들에게 날랐다. 평소에는 각자의 별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손님들도 오늘만큼은 식당의 따스한 조명 아래 모여 왁자지껄한 대화를 나누었다. 바깥과 이어진 식당 입구에는 헨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 때문에 실내로 들어오지 못했지만, 헨리는 커다란 창가에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파티를 감상했다.
“헨리, 마가렛이 준비한 간식이에요.”
“이토록 풍요로운 밤이라니. 숲의 정령들도 기뻐서 춤을 추겠군요.”
설탕에 절인 사과와 깨끗하게 씻은 당근을 창틀에 올려두자, 헨리는 부드러운 콧소리를 내며 고마움을 표했다. 식당 내부에서는 그림자 같은 형체가 손님들의 다리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로 스테이크 조각을 얻어먹겠다는 일념으로 민첩하게 돌아다니는 밍크였다.
“거기 손님, 불쌍한 고양이를 위해 스테이크 한 점 나눠 주지 않을래?”
밍크는 손님의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고, 애교에 속은 손님이 고기 한 점을 나눠주자마자 미련 없이 홱 돌아섰다. 에드먼드 또한 오늘만큼은 프런트가 아닌, 식당 구석의 바 카운터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거품이 풍성한 맥주잔을 기울이면서도, 손님이 말을 걸면 수다쟁이처럼 변해 실없는 농담을 했다.
웬디는 그런 에드먼드를 보며 창고에서 마주했던 에드먼드 글록의 잔상을 잠시 떠올렸다. 산장이 유일한 안식처라는 그의 말처럼, 영웅이라는 거창한 별명보다 시끌벅적한 식당의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훨씬 편해 보였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그때, 식당 입구로 마지막 손님이 들어섰다. 웬디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식당 입구를 바라보았다. 빨간 드레스 차림으로 들어오는 여자는 아침의 흐릿한 그림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앨리스 씨!”
웬디는 반갑게 달려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앨리스는 수줍게 웃으며 웬디의 손을 맞잡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런저런 연기를 시도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에이, 아니에요. 얼른 여기로 오세요.”
웬디는 그녀를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한 뒤, 주방으로 가 방금 구워진 스테이크와 호박 수프 접시를 가지고 나왔다.
“음료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오렌지 주스, 레몬 주스, 거품맥주까지 세 가지가 있어요.”
“레몬 주스로 부탁할게요.”
다시 만난 앨리스의 목소리는 맑고 단단했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앨리스라는 사람 자체로 빛나는 듯했다.
“안녕, 새로운 손님?”
앨리스가 고기를 나이프로 썰자, 밍크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말을 걸었다. 웬디는 그런 밍크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밍크, 손님 음식 뺏어먹기만 해 봐.”
밍크는 짐짓 점잖은 척 앞발을 핥으며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웬디는 물방울이 맺힐 만큼 시원한 레몬 주스와 자신 몫의 오렌지 주스 잔을 챙겨 와 앨리스의 건너편에 앉았다.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전혀요. 비록 상상에 불과하지만, 제가 늘 꿈꾸던 무대와 시상식장에도 올라갈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어요.”
“앨리스 씨라면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올라갈 수 있을 거예요.”
웬디의 격려 가득한 말에, 앨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제 안의 목소리에 집중해 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동안 저는 남의 껍데기를 흉내 내는 일에 급급해서, 정작 제 감정을 실어내는 연기력은 한참 부족하다는 점을요.”
앨리스는 불안한 듯 주스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이 길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요. 그저 남을 흉내 내기를 그만두려고 하니 겁이 나더라고요. 나조차도 이제 막 발견한 투박하고 서툰 모습이, 과연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비칠 수 있을까, 하고요.”
웬디는 차가운 물방울이 앨리스의 손가락을 타고 미끄러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사실 저도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마트 직원에 불과했어요.”
앨리스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산장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마음을 살피는 웬디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매일 같은 유니폼을 입고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는 게 일상의 전부였어요. 잘하는 것도 없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었어요. 누가 저에게 취미나 꿈을 물어보면 당황해서 입을 다물 정도로요.”
웬디는 시끌벅적한 식당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따뜻한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생이 언제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오늘의 불행도 어쩌면 거짓말처럼 행복으로 바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런 저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변했어요. 그러니 앨리스 씨도 변화를 너무 겁내지 마세요. 적어도 앨리스 씨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알고 계시니까요.”
웬디의 진심 어린 위로는 다른 손님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나왔다.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어린 불안이 완전히 걷히진 않았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었다.
“아, 좋은 말씀이군요. 삶이란 굴곡이 있기에 멀리서 봤을 때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법이지요.”
그때, 밤이슬을 머금은 바람과 함께 창문 너머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손님께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창문 틈으로 회색 갈기를 우아하게 휘날리는 헨리가 길쭉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앨리스는 사람보다 유창한 말투를 내뱉는 말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면, 이런 상황이 익숙했던 웬디는 헨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헨리. 헨리의 말은 항상 깊은 울림이 있는걸요. 어서 들려주세요.”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는 과거 ‘아름답다’라는 말이 ‘아(我)답다’에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아(我)란 곧 자기 자신을 뜻하는 단어라더군요.”
“그러면 아름답다는 뜻이 나답다는 말인가요?”
웬디가 곧바로 묻자, 헨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답했다.
“물론 여러 가설 중 하나이긴 합니다. 외모가 빼어난 여인을 두고 아름답다고 표현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어차피 진실을 알 수 없다면 저는 나답다는 뜻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답다...”
앨리스는 홀린 듯 나답다는 말을 몇 번 되뇌었다. 헨리는 그런 앨리스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 남들에게 아름답게 비친다는 말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멋지고 화려한 모습보다, 앨리스 양다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군요.”
“좋아요. 그러면 오늘의 건배사는 정해졌네요!”
웬디는 헨리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바로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느닷없는 웬디의 건배사에, 식당에 있던 손님들은 각자 마시던 음료를 치켜들며 호응했다. 갑자기 모두의 관심이 쏟아진 웬디는 식겁하며 몸을 홱 낮췄고, 그 모습에 손님들은 배를 부여잡고 크게 웃었다. 이른 저녁에 시작된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밍크는 배를 채우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졌고, 펠은 취기가 오른 손님의 어깨 위에서 쉴 새 없이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덕분에 파티의 인기쟁이가 됐다. 파티가 끝나고 손님들이 각자의 별채로 돌아간 깊은 밤, 마가렛과 함께 파티 뒷정리를 마치고 방으로 가려던 웬디는 집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 에드먼드를 발견했다.
“에드먼드 씨, 안 주무시나요?”
“곧 자러 갈 생각이라네.”
웬디는 이내 에드먼드의 책상에 올려진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바로 창고에서 그녀가 발견한 은색 훈장이었다.
“훈장을 다시 꺼내셨네요.”
에드먼드는 훈장 중앙의 보리이삭 문양을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이건 훈장이 아니라 족쇄라네. 명령을 어긴 죗값을 치르는 대신, 그들이 내민 가식적인 용서였지.”
“그렇다 해도 에드먼드 씨가 수많은 생명을 살린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웬디는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가 훈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번 기회에 훈장을 현관에 걸어두는 건 어떠세요? 이건 더 이상 에드먼드 씨를 가두는 족쇄가 아니에요. 산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산장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이정표죠.”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에드먼드의 꾹 닫힌 입을 바라보던 웬디는 설득을 포기했다. 아무리 그녀가 훈장을 좋은 의미로 해석한들, 당사자가 상처로 느끼고 있다면 먼저 말을 꺼내선 안 될 일이었다. 웬디는 더 이상 그를 방해하지 않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혼자 남겨진 에드먼드는 자신의 훈장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다음 날 아침, 1층으로 내려온 웬디는 프런트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본관에 들어오는 손님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벽면에, 처음 보는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반 위에는 에드먼드의 은색 훈장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훈장을 비추자, ‘대기근의 영웅, 에드먼드 글록’이라는 글자가 찬란하게 빛났다.
“에드먼드 씨!”
웬디가 프런트 너머에 있는 에드먼드를 향해 아이처럼 방방 뛰자, 에드먼드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먼지가 잘 쌓이는 곳이니, 자주 닦아야 할 걸세.”
“그럼요! 세상에서 제일 반짝거리게 닦아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