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현관에 들어선 웬디는 신발 밑창에 들러붙은 계절의 잔해들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신발에는 봄 별채 마당에서 묻은 진흙이 으깨진 벚꽃 잎과 함께 분홍색 얼룩으로 남았고, 오른쪽 신발에는 겨울 별채에서 묻은 눈이 밑창 틈새에 끼어 있었다. 앞치마 주머니 속에는 가을 별채에서 날아온 바스러진 단풍잎 조각들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은 산장의 사계절 별채에 손님들이 모두 들어선 드문 날이었다. 그 덕분에 웬디는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봄 별채 손님은 돗자리를 깔고 소풍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다는 요청을 보냈고, 겨울 별채의 손님은 온몸이 하얀 털로 뒤덮였음에도 자꾸만 두꺼운 모피를 요구했다. 평소보다 더 까다로운 손님들로 인해 웬디는 벌써 별채와 본관을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특히 습한 여름 공기를 마시다 곧장 차가운 겨울 공기를 들이마시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목구멍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기겠지?”
웬디가 새로운 신발을 갈아 신고 잠깐 응접실에서 쉬려는 찰나, 에드먼드 대신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펠이 말했다.
“까악! 웬디. 쉴 시간이 없어. 봄 별채 손님이 페퍼민트 차와 호박 수프를 원하신다! 그리고 겨울 별채에서도 난롯불이 약하다고 참나무 장작을 요청했어!”
“하여튼 입이 방정이지. 바로 갈게요, 펠!”
웬디는 괜한 말을 했다며 제 입을 톡 치고, 둥근 은제 쟁반을 챙겼다. 그리고 식당에서 페퍼민트 차와 따뜻한 호박 수프, 그리고 네 갈래로 쪼갠 참나무 장작 몇 개를 차례로 쌓아 올리고 밖으로 향했다. 마트에서 명절 대목을 맞이했을 때보다 어깨가 더 결리고 고단했지만, 신기하게도 웬디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던 시간보다 꽃향기와 눈바람을 맞으며 걷는 지금이 훨씬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엔 손님들이 감사 인사를 꼭 잊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오호호, 고마워요. 그쪽도 와서 같이 소풍을 즐길래요?”
“지금은 바빠서 마음만 받을게요, 손님!”
소매에 프릴이 가득한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웬디에게 동석 여부를 물어봤고,
“자, 자꾸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난로는 제, 제가 지필게요.”
“괜찮아요, 손님.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요청해 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털로 뒤덮인 설인 손님은 무엇이라도 거들고 싶어 했다. 비록 그것이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하더라도, 예의를 갖추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은 한층 정겹게 느껴졌다. 봄 별채에 차와 수프를 전달하고 겨울 별채의 난로에 불까지 지핀 웬디가 본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본관 입구에 드리워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두커니 멈춰 섰다. 처음에는 현관에 설치된 조명에 그림자가 진 줄 알았으나, 밝은 빛 아래서도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형체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형체는 사람의 형상을 닮았지만, 이목구비가 수채화 물감이 번진 것처럼 흐릿했다.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부분은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형체를 투과해 보이는 뒤편의 풍경은 물결치는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듯 어지럽게 왜곡되어 있었다. 누군가 연필로 쓱쓱 그린 밑그림을 손가락 끝으로 뭉개버리면 저런 모습일까. 웬디는 쟁반을 꽉 쥐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갔다.
“혹시, 손님이신가요?”
웬디의 목소리가 닿자, 그림자 같은 형체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순간, 얼굴이라고 짐작되는 부분에 코와 눈의 형태가 맺히더니, 이내 연기처럼 흩어지며 뭉개졌다. 웬디는 왠지 상대가 들끓는 수증기로 이루어져 금방이라도 증발할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잘 모르겠어요.”
상대의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남자아이와 젊은 여자, 연로한 노인 등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불협화음처럼 겹쳐서 들렸다. 그 소름 끼치는 울림 속에서 웬디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읽어냈다.
“모르겠다고요?”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에 있었어요.”
상대는 혼란스러운 기색이 물씬 느껴지는 대답을 하며 어깨를 미세하게 떨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따뜻한 차를 준비해 드릴게요.”
웬디는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일단 그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기로 했다. 응접실로 손님을 안내한 웬디는 양모 담요를 가져와 떨리는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담요가 형체를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담요는 일렁이는 어깨 위에 포근히 안착했다. 그 사실에 안심한 웬디가 벽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 저기 벽난로를 보시겠어요?”
“벽난로요?”
“네. 저기에 손님이 품고 있는 생각들을 집어넣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림자 손님은 웬디의 말대로 지금 느끼는 혼란한 마음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검은 연기 같은 아지랑이가 스르르 피어올랐다. 꺼진 난로 안으로 들어간 아지랑이는 한곳에 뭉치더니, 칙 소리와 함께 보라색 불꽃을 피워냈다. 보라색 불꽃은 뜨거운 열기 대신 머릿속을 맑게 비워주는 서늘한 냉기를 내뿜었다. 벽난로에서 나온 보라색 불빛이 응접실을 채우자, 흐릿했던 손님의 형체가 조금 선명해졌다. 여전히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건너편이 투명하게 비추는 일은 없었다. 손님이 멍하니 불빛을 쬐는 동안, 웬디는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내놓았다.
“불꽃색이 예쁘죠? 손님의 불안이 이렇게 신비로운 빛을 내고 있어요.”
손님은 웬디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윽고 그림자에서 여러 겹의 목소리가 섞인 듯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하는지도요. 그저 남들이 바라는 대로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됐어요.”
손님은 심지어 자신의 성별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친절하다고 한 말도, 차갑다고 한 말도 기억이 나는데, 정작 내가 무슨 일은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텅 비어버린 것 같아요.”
웬디는 넋두리 같은 손님의 말에 들으며 조용히 공감했다. 그녀 역시 명찰 뒤에 자신을 숨긴 채, 손님들의 무리한 요구에 억지 미소를 수천 번도 넘게 지었다. 그러다 퇴근길 상가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이 너무나 낯설어 입가를 손으로 꾹 누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억지로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산장에는 손님을 함부로 규정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웬디는 에드먼드가 내려오기 전까지 건너편 소파에 앉아 손님의 슬픔을 온몸으로 경청했다.
* *
“도플갱어로군.”
에드먼드는 응접실에 있는 손님의 상태를 보자마자 말했다.
“도플갱어요?”
웬디는 생경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를 만나면 죽는다는, 그 괴담 속 존재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저 손님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네. 후천성 도플갱어거든.”
에드먼드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벽난로 속 불꽃을 응시하는 손님을 힐끗 쳐다봤다.
“남들의 눈치를 과하게 보고,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자신을 조각하다가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라네. 말 그대로 타인을 모방하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지.”
에드먼드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군. 저 도플갱어는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에드먼드 씨가 초대장을 보내신 게 아니었나요?”
웬디가 의아한 듯 되묻자, 에드먼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가의 유령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적은 있어도, 저렇게 무색무취로 변한 도플갱어에게 보낸 적은 없다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죠? 도플갱어를 대하는 요령이라도 있나요?”
에드먼드는 기억을 더듬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도플갱어는 변한 시간과 상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뉘었다.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도플갱어는 보통 기억의 일부만 소실된, 단기 기억 상실증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상태가 호전되거나, 아끼던 물건이나 추억이 담긴 사진 등을 통해 금방 회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응접실에 있는 손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심각한 상황이었다.
“원래라면 저런 경우는 인적이 드문 곳에 격리하지. 지금은 얌전해 보여도, 자아를 찾으려는 본능이 강해서 언제 공격성을 보일지 모르거든. 텅 빈 기억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억을 탐내려 들 수도 있지.”
웬디는 에드먼드의 말이 어딘가 섬뜩하게 들렸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손님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저 손님을 도울 방법이 정말 없을까요?”
“지난번에도 느낀 바지만, 자네는 참 오지랖이 넓구먼.”
에드먼드의 핀잔에 웬디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익숙했다. 에드먼드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웬디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오지랖이라 해도 좋아요. 하지만 저렇게 힘들어하는 손님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건,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안 되겠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뭐든지 할게요.”
에드먼드는 못 이기겠다는 듯 한숨을 내쉰 뒤, 위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단은 같이 창고로 가세. 손님이 잃어버린 색채를 찾을 만한 물건이 있는지 봐야겠군.”
웬디는 에드먼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산장에서 일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지만, 웬디에게 있어 2층 창고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산장 일에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입구 근처에 있었고, 그나마도 에드먼드가 챙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잠긴 문을 열고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금속 향,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났다. 천장까지 이어진 철제 선반 위에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상자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주인이 없는 마법 도구나 유물이라네. 가만히 있으면 자기들을 선택해 달라고 속삭이기도 하지만, 너무 귀를 기울이진 말게.”
에드먼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디의 귓가에 누군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를 봐줘.”
“날 여기서 꺼내줘!”
등골이 오싹해진 웬디는 팔을 문지르며 물었다.
“여기에 있는 상자들을 다 열어봐야 하나요?”
선반에 있는 상자들과 공간이 부족해 바닥에 층층이 상자들의 수는 최소 백 개는 넘었다. 에드먼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상자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음, 내 예상보다 더 많군. 그러면 내 방에서 투시 안경을 찾아올 테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게.”
에드먼드는 그렇게 말한 뒤 웬디를 두고 밖으로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오자 유물들의 속삭임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똑딱거리는 낡은 괘종시계의 톱니바퀴 소리, 허공에 무언가를 써내려 가는 깃펜 소리, 그리고 희미한 잉크 냄새까지, 유물마다 서로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 탓에, 웬디는 북적거리는 시장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웬디는 가까운 곳에 있는 상자들을 몇 개 열어봤다. 굽이 닳아버린 가죽 구두는 제멋대로 바닥을 두드리며 경쾌한 스텝을 밟았다. 주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지만, 구두 속에 깃든 무도회의 기억이 여전히 뜨거운 모양이었다. 그 옆에 있던 선반에서는 허공에 매달린 깃펜 하나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듯, 깃펜은 허공에 날카로운 필체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나의 마지막을 이 유서에 남긴다. 나의 모든 유산은 내 아내와 자식들에게...]
최소 수천 번은 반복했을 문장은 이번에도 완성되지 못한 채 도입부를 맴돌았다. 웬디는 허공에 흩뿌려진 잉크 자국들을 보다가 재빨리 상자를 닫았다. 그리곤 슬그머니 창고 가장자리로 향했다. 선반에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웬디는 옆에 있던 상자 위에 올려진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작은 상자 크기의 물건을 남색 비단으로 감싼 것이었다.
웬디가 비단에 손을 뻗는 순간, 요란하던 구두 소리도 깃펜의 사각거림도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웬디는 조심스럽게 비단의 매듭을 풀었다. 비단에 싸인 건 나무로 만든 고급스러운 함이었다. 함을 여는 순간, 귓가를 어지럽히던 유물의 속삭임이 일시에 멈췄다. 이질적인 정적 속에서 웬디는 함 중앙에 있던 빛바랜 은색 훈장과 마주했다. 훈장의 중앙에는 정교한 보리이삭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훈장의 뒷면에는 송곳으로 각인한 듯한 글귀와 중앙에 박힌 하늘색 수정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먼드 글록 – 대기근의 영웅]
그 이름을 읽는 순간, 훈장 중앙의 수정이 일렁이며 냉기가 웬디의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깜짝 놀란 그녀가 훈장을 놓으려 했지만, 이미 창고의 풍경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듯 멀어졌다. 세상이 잠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메마른 흙먼지와 타들어 가는 열기가 웬디의 정신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