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거울과 족쇄 (2)

by 달빛타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먼지 쌓인 창고 대신 지독한 흙먼지를 풍기는 대지가 그녀를 맞이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지 땅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처참하게 갈라졌고,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이 말라 비튼 나뭇가지처럼 여기저기에 주저앉아 있었다. 웬디는 초첨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통해 이곳이 훈장에 새겨진 대기근의 참상임을 깨달았다.


“민간인에게 마력을 낭비하지 마라! 전부 공격 마법으로 전환해!”

그때, 귀청을 울리는 고압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에는 남색 제복을 갖춰 입은 마법사들이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렬로 반듯하게 선 마법사 뒤에는 붉은 휘장을 두른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사내는 콧등이 볼록한 매부리코와 왼쪽 볼을 가로지르는 굵은 십자 모양의 흉터 때문에 인상이 제법 험악했다.


“마법사님! 제발, 제발 비를 내려주세요.”

농토와 식량을 모두 잃은 사람들이 앙상한 팔을 뻗으며 기적을 갈구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시선은 무심했다. 그들 중 누구도 소중한 마력을 굶주린 이들을 위해 사용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 순간, 군중 사이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몸과 얼굴을 가리는 로브 차림이었지만, 손에 잡힌 지팡이로 보아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마법사들을 마주 보고 멈춰 선 남자는 후드를 벗었다. 웬디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지금보다 훨씬 날카롭고 서슬 퍼런 눈매였지만,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술과 겨울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의 주인은 틀림없이 에드먼드였다.


“지금 이 땅은 생기를 잃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지를 깨우는 마법의 사용을 허락해 주십시오.”

“기각한다!”

매부리코 상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소명은 이 땅을 위협하는 사특한 존재들을 막는 것이다. 그를 위해선 한 톨의 마력도 아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굶어 죽는다 해도 말입니까?”

“평화에는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에드먼드의 호소에도 상관은 요지부동이었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마법 부대에 지원했던 젊은 마법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압살드라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광이라 배웠습니다만, 그 영광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에드먼드 글록! 그 발언은 심각한 문제의 소지가 있군! 이대로 군 재판에 넘겨지고 싶은 건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에드먼드는 어깨에 달린 휘장을 거칠게 뜯어냈다. 메마른 땅 위로 떨어지는 휘장을 본 상관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저는 지금 군인이 아닌, 한 명의 마법사로 이곳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에드먼드는 차갑게 웃으며 지팡이를 갈라진 땅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곧이어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황금색 마력이 에드먼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마력이 대지의 틈새로 스며들자, 갈라진 틈이 빠르게 메워지고 지표면을 뚫고 푸른 싹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적 같은 광경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굶주린 사람들은 곧바로 에드먼드를 향해 엎드려 울분을 토해냈다.


“감사합니다! 영웅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좌절하던 이들의 눈동자에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불꽃이 번졌다.


“에드먼드 글록! 이번 일은 상부에 낱낱이 보고할 것이다!”

상관은 무릎을 꿇은 에드먼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홀로 무모한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에드먼드의 몰골은 처참했다. 입에서는 붉은 피를 토해내고, 생기 넘치는 회색 머리카락은 색을 잃고 새하얗게 변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에드먼드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시력까지 문제가 생겼는지 초점이 흔들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오히려 상관을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방금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평화에는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른다고.”

“... 에드먼드 씨.”

웬디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에드먼드에게 닿기도 전에, 눈앞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웬디는 어느새 먼지가 쌓인 창고로 돌아와 있었다. 손바닥에는 아까 집은 은색 훈장이 들려 있었다. 웬디가 훈장에 새겨진 에드먼드 글록이라는 이름을 빤히 바라보던 때였다.


“잠시 기다리라 했더니, 그새를 못 참았군.”

“에드먼드 씨.”

어느새 다락방에서 창고로 돌아온 에드먼드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고글을 닮은 투시 안경이 들려 있었지만, 시선은 웬디의 손에 들린 훈장에 향해 있었다.


“그건 그저 버려진 흔적일 뿐이라네.”

“그러면 방금 제가 본 게, 그러니까...”

웬디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에드먼드는 뚜벅뚜벅 걸어가 웬디의 손에서 훈장을 가져갔다.

“자네가 본 건 내 과거가 맞다네. 훈장을 만지는 순간 수정에 걸린 환상 마법이 발동하는 식이지.”

“이 훈장을 받으신 거면, 처벌은 받지 않으신 건가요?”

“처음에는 부대에서 군법을 어긴 나를 처벌하려 했지만, 높은 자리에 있던 누군가 대기근에 앞장서서 나선 마법사라며 나를 칭송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네.”

훈장을 바라보는 에드먼드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부대는 처벌 대신 이 화려한 훈장을 내렸지. 하지만 그들은 이 훈장에 내가 고통스러워하던 순간을 환상 마법으로 박제했다네. 영웅이라는 칭송 뒤에 숨겨진, 명령을 어긴 자에 대한 비열한 조롱이었지.”

웬디는 환상 속에서 보았던 에드먼드의 하얀 머리카락과 핏발 선 눈동자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하지만 영웅이라 불리게 됐는데, 왜 거기서 나오신 건가요?”

에드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웅이라는 별명은 권력자들이 휘두르기 편한 도구에 불과하다네. 필요하다면 처벌받아야 할 죄인을 하룻밤 사이에 영웅으로 만들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배운 마법이 정치적 도구가 되는 모습을 보자 오만한 세계에 신물이 나더군.”

웬디는 그제야 에드먼드가 산장을 찾아왔던 마법 국세청 직원에게 딱딱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나비 조사관이 읊어대던 마력 관리법 같은 단어들이 에드먼드에게는 굶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던, 상관의 평화와 똑같이 들렸을 것이다.


“우울한 이야기는 이만 넘어가지. 중요한 건 현재 아니겠나?”

에드먼드의 목소리는 금세 평온해졌지만, 웬디는 그가 겪었을 상처가 안타까워 괜히 입을 달싹였다. 에드먼드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들고 있던 투시 안경을 눈가에 가져다 댔다.


“자, 이제 우리 일을 하지. ‘자신’을 잃어버린 손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겠나?”

에드먼드는 평소처럼 싱거운 농담을 하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안경 너머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먼지 쌓인 상자를 비추자, 안에 들어있는 유물들이 투시되듯 모습을 드러냈다. 유물들을 훑어보던 에드먼드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저거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겠군. 웬디, 세 번째 선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상자를 꺼내게. 그래, 그거라네.”

웬디는 에드먼드가 가리키는 상자를 집어 빼냈다. 상자 안에는 테두리에 기묘한 선이 그려진 타원형 거울이 들어 있었다.


“이건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네. 원래는 긴가민가한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는 용도이지만, 손님에게도 유용할 걸세.”

에드먼드는 후 바람을 불어 거울 표면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곤 먼저 뒤돌아 창고 밖으로 걸어갔다. 웬디는 훈장이 들어 있던 함을 바라보다가 에드먼드의 뒤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 벽난로 속 불꽃은 여전히 서늘한 냉기를 뿜어냈고, 도플갱어 손님은 담요 속에 파묻힌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손님, 이 거울을 한번 보시죠.”

에드먼드는 테이블 위에 거울을 올려두며 말했다.


“거울... 인가요?”

“평범한 거울이 아니라, 손님의 영혼이 기억하는 모습을 비춰줄 겁니다.”

손님은 부드러운 그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몸을 돌려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뿌연 안개만 가득하던 거울 표면에서 서서히 빛이 모이며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웬디 역시 손님의 뒤편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 *


앨리스는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빨랐다. 동시에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옆집 아이가 울면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비비며 같이 우는 척했고, 화가 많은 어머니가 씩씩거릴 때면 숨을 죽인 채 숨어다녔다. 그녀에게 있어 주변 사람들의 기분은 거스를 수 없는 날씨와 같아서, 늘 상황에 맞는 표정과 태도를 갈아입어야 했다.


“너는 꼭 투명한 유리병 같아.”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무심코 그런 말을 던졌다. 무언가를 담기 전까지는 자신만의 색채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자신만의 색채가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황에 맞춰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흉내 내는 법을 익혔다. 때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앨리스로, 때론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앨리스로. 사람들을 늘 자신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앨리스를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재연배우가 된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타인의 모습이라는 가면을 쓰는 동안은 정체 모를 불안함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앨리스는 완벽하게 타인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들여 쌓은 재연배우라는 경력은 몇 년 뒤 낙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지원했지만, 오디션 현장에서는 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대중에게 이미지가 너무 많이 소비되었다는 게 이유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어느 평범한 날에 찾아왔다. 앨리스는 길을 걷다 돌연 경찰에게 붙잡혀 바닥에 고꾸라지는 치욕을 당했다. 한 달 전, 범죄 재연극에서 대역을 맡았던 방송을 본 시민이 그녀를 진짜 범죄자로 오인해 신고한 것이다. 오해는 금방 풀렸지만, 앨리스의 자존감은 그날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좌절감에 휩싸인 앨리스는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한 공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한 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여자는 머뭇거리며 앨리스의 옆에 노란 꿀물이 든 유리병과 밴드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거라도 마시고 힘내세요.”

앨리스는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할 때, 유일하게 나서준 여자에 대한 고마움이 울컥 치밀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을 땐, 여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 *


거울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자, 응접실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대면한 덕분인지, 일렁이던 앨리스의 형체는 눈에 띄게 선명해져 있었다. 번져 있던 이목구비는 점차 선명해졌다. 앨리스는 멍하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하게 비치던 손끝에 다시 온기가 돌고 있었다.


“이제 기억나요. 내가 필사적으로 쌓은 커리어가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순간,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었어요. 이 고통도, 차별도, 그리고 나 자신도요.”

“사람들이 당신이 입었던 옷만 보고, 그 안의 진심을 외면했네요.”

웬디의 말에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같던 형체는 이제 완전한 피부의 질감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응접실 안에는 이제 흐릿한 유령이 아닌, 단정한 인상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대체 뭘 위해 노력한 걸까요? 어차피 비주류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웬디는 자책하는 앨리스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아니에요. 손님은 그 수많은 비주류의 삶에 숨을 불어넣었어요. 그건 부끄러운 얼룩이 아니라,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공감의 흔적일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앨리스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웬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 번 믿어보세요. 손님이 지워버리고 싶던 순간들은 오히려 손님이 필사적으로 살아왔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앨리스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웬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기묘한 기시감이 그녀를 덮쳤다. 방금 거울 속에서 보았던, 유리병을 내려놓던 손과 웬디의 손이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어색하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네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곧 앨리스의 얼굴에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앨리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웬디를 향해 외쳤다.


“당신이었어요! 세상에, 당신이었어!”

“네?”

방금까지 우울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환희에 찬 얼굴로 소리치자, 웬디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에드먼드는 앨리스와 아는 사이인지 되묻듯 웬디를 넌지시 바라봤지만, 웬디라고 영문을 알 리 없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공원이요! 헤네시 거리를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작은 공원이요!”

웬디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앨리스가 말하는 공원은 출퇴근길에 늘 경유하는 공원이었다.


“제가 서러움에 펑펑 울고 있을 때, 제 옆에 꿀물 병을 두고 갔던 사람이 당신이었어요!”

공원과 꿀물이라는 말이 웬디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마트에서 해고당하고 쓸쓸히 집으로 향하던 길, 공원 벤치에서 서글프게 우는 여자를 발견하고 꿀물을 두고 간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 어! 설마, 진짜 그때 그분이세요?”

깜짝 놀란 웬디는 앨리스를 가리켰다. 그때의 꿀물은 자신의 처지도 돌보지 못하던 시절에 부린 사소한 호의였다. 괜한 오지랖이라 자책하며 도망치듯 떠났던 그 일이 이렇게 길게 이어져 지금에 닿았다는 게 믿기지 ㅇ낳았다.


“그때 당신이 두고 간 병이 식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어요. 그게 제 생애 마지막 온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당신을 만나다니!”

웬디도, 앨리스도, 이 엄청난 우연을 두고 쉽사리 믿지 못하는 사이, 두 사람의 재회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에드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였군.”

그는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무슨 뜻인가요, 에드먼드 씨?”

“저 손님이 우리 산장에 오게 된 건 우연이 아니라는 말일세.”

“우연이 아니라고요?”

웬디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도플갱어는 자아를 상실했기 때문에 원초적인 본능에 이끌려 행동한다네. 그런데 저 손님은 텅 빈 내면을 자네가 건넨 온기로 채우려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도플갱어가 되고 쭉 자네를 찾아 나섰고, 그걸 알아챈 숲이 입구를 열어준 거지.”

“숲이 어떻게 앨리스 씨를 알고요?”

“숲이 누군지 따져가며 들였겠나. 길에서 쓰러진 이를 보고 본능적으로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거지.”

웬디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지폐 한 장에 불과한 사소한 호의가, 삶에 지친 누군가를 이곳에 데려온 초대장이 되었다. 항상 먼저 손을 내밀고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탓에 쓸모없는 오지랖이라고만 여겼던 일이 누군가를 살려냈다는 걸 깨닫자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도플갱어? 숲?”

앨리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눈치였다. 에드먼드는 그런 앨리스를 흘끗 쳐다본 뒤 말했다.


“웬디, 손님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다섯 번째 별채로 안내하게. 당장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네.”

웬디는 앨리스와 함께 응접실을 나왔다. 사계절 별채를 지나 더 안쪽으로 걸어가자, 흰색 지붕의 아담한 건물이 나타났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구 하나 없이 사방이 유리로 된 듯한 투명한 내부가 나타났다.


“여긴 대체 뭐죠?”

앨리스는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고 경계하듯 물었다.


“여기는 손님 내면의 빛으로 채워지는 방이에요.”

“내면이요?”

앨리스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손님의 상상에 따라 구조가 달라져요. 손님께서 바닷가를 생각하면 바다가 되고, 들판을 생각하면 들판이 되죠.”

“무슨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그야 이곳은 마법산장이니까요.”

웬디는 벙찐 표정이 된 앨리스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편한 시간 보내세요, 손님.”

그렇게 문이 닫히고 웬디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별채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앨리스는 통유리 같은 별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별채의 구조가 변한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앨리스는 공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마법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이나 영화를 선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끈 웬디를 믿고 무엇이든 해보기로 했다. 바로 연기였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그렇지 않나요?”

아무런 대본도 없이 꺼낸 인사는 어색하기만 했다. 앨리스는 대사에 맞는 표정을 떠올렸다. 재연극 속 비난받던 악역의 미소를 지었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어 누군가의 불륜 상대로 손가락질받던 여자의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감정 역시 진짜가 아님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그건 내가 아니야.”

앨리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사이, 투명했던 벽이 독백 연기를 위한 세트장처럼 짙은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배경이 달라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메라의 앵글도, 감독의 사인도 없는 낯선 장소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제 이름은 앨리스에요.”

이름 한 줄 말한 뒤로 앨리스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녀는 과연 어떤 목소리 톤이, 어떤 말투가 앨리스라는 사람을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늘 누군가의 대본을 빌린 탓에 속내를 털어놓는 일이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웬디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필사적으로 살아온 증거라는 한마디를.


“어렸을 때부터 저는 남을 흉내 내는 걸 좋아했어요. 아니, 사실은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가 무서웠던 것 같아요.”

앨리스는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삶을 읊었다. 겁많은 아이가 남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했던 조용한 노력, 대사 몇 마디 없는 조연에 발탁되고 소리 없이 울던 기억, 더듬더듬 이어지던 말은 나중에 가서는 어떤 말부터 꺼낼지 고민될 정도로 빨라졌다.

잠시 후, 앨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비련의 여주인공이 흘리는 처연한 눈물이 아니었다. 범죄자로 오인을 받아 수모를 겪었을 때의 모멸감과 오디션 기회조차 뺏겼을 때의 박탈감이 섞인, 거칠고도 투박한 울음이었다.


“그러니 제발 누군가의 대역이 아닌, 나라는 사람을 봐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치는 순간, 별채 내부의 색채가 폭발하듯 변했다. 그녀가 평생 담아왔던 수많은 감정이 타인이라는 가면을 부수고 그녀만의 빛으로 뿜어져 나왔다. 남색으로 가득했던 벽면은 노란빛과 주황빛이 뒤섞여 요동쳤다. 오로라가 펼쳐진 듯한 화려한 광경 속에서 앨리스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대신 자신만의 무대 위에 선 주인공으로서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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