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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나그네 Jun 30. 2020

뉴욕에 동물원이 있다고?

Bronx Zoo, 신기한 동물들의 향연, 그것은 강대국의 탈취였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5분만 더 잘지, 바로 일어날지, 아침을 무엇을 먹을지, 퇴근하고는 또 무엇을 할지 같은 수 없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학 원서를 어디로 쓸지, 어학연수를 갈지 말지, 결혼은 언제 할지, 이사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 지처럼 어떤 순간에는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또 찾아왔다. 작은 결정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또 큰 결정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중간 정도 크기의 결정을 했던 순간이다. 


 2017년에는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10일 정도의 황금연휴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기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는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 기간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너무도 아까웠다. 몇 년 만에 오는 연휴라는 이야기부터 해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휴일을 보내면 완전 아쉬울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소 비싼 값이었지만 뉴욕행 항공권을 다소 충동적으로 발권해 버렸다. 연휴가 연휴였던 만큼 직항은 구매할 엄두도 나지 않아, 출발과 도착 시 도쿄에서 반나절 정도 머무는 일정으로 항공권을 구매했다. 연휴 기간 도쿄까지 이틀 여행할 수 있다는 논리로, 비싸게 샀던 항공권을 합리화했다. 그리고 반추해 보자면, 그 결정은 참 잘했던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북새통이었던 인천 공항에서 도쿄행 비행기를 먼저 탔는데, 이륙한 지 10분 만에 심각한 위경련이 느껴졌다. 허리를 펼 수 없을 것 같았고, 그 순간 바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배를 움켜쥐기를 몇 번 마치자 어렵사리 하네다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 정도는 펼 수 있었지만,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지만 경험적으로 위경련은 최대 24시간을 넘지 않았으니 곧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통증이 거의 없었고,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6시간 남짓 시간 동안 온갖 식도락 여행을 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규카츠, 라멘, 카스테라, 샌드위치와 푸딩 디저트까지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위경련은 있었지만 나의 위는 여전히 위대(胃大)하고, 위대(偉大)했다.

 알찬 먹방을 마친 후 비행기에서도 계속된 먹방을 이어나가며, 부루마불 게임판에서나 보던 뉴욕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 후 처음 먹었던 아침은 베이글 샌드위치였다. 금방 구운 베이글 빵에 달걀 오믈렛, 베이컨, 토마토, 연어, 그릭고 각종 샐러드까지 환상의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다소 큰 편이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져서 아쉬웠다. 그 아쉬움은 미국에만 있다던 미국에만 있다던 던킨 엑스라지 커피로 달랬다. 700m 정도였는데, 그 은혜로운 크기의 커피를 매일 찾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스럽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이런 미국 사이즈(?)는 LA를 갔을 때도 느꼈었는데, 그 어떤 1인분도 한 끼 식사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정도였다. 모두 먹지 못하고 남기거나 별도로 포장해 가는 사람이 많았었다. 그 양은 한국 식당 기준으로 1.5인분 정도 됐었다. 괜히 비만율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1.5인분 같은 1인분을 단 한 번도 남겨본 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많이 먹을 수 있는 덕분에, 또 여행을 하면서 체력소모가 많았던 까닭에 가능했었던 것 같다. 


 정말이지 뉴욕은 여행해본 나라 중 가장 체력 소모를 많이 필요로 하는 도시였다. 물론, 택시만을 이용하거나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그렇게 많이 걸을 필요도 없지만, 비싼 돈을 내고 날아온 만큼 최선을 다해 여행하고 싶었다. 또, 맨해튼의 교통체증 때문에 한두 정거장 정도는 버스를 타기보단 걷는 편을 택했다. 직업적인 여행을 했었다. 버리는 시간 없이 관광지를 찾아다녔고, 관광지가 문을 닫는 시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관람했다. 그렇게 뮤지컬 관람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대체로 10시 반 정도가 됐었는데 어두운 시간이라 다소 무섭기도 했다. 맨해튼의 숙소가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주변의 숙박비는 너무 비싼 편이라 맨해튼에서 지하철로 5정거장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 상상도 못 했는데 화근이 될 뻔했다. 


 그 순간의 오싹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늘 그렇듯 익숙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 마냥 지하철을 내려 유유히 호텔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편 인도 쪽에 있던 어떤 차량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못 들은 척하며 속보로 걸어갔는데, 차가 이동하면서 나를 부르며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체격 좋은 흑인의 눈빛이 매섭게 느껴졌고 더 빠르게 이동했다. 숙소까지는 단 5분. 그렇지만 아무리 빨라도 차보다 빠를 수는 없었고, 주변은 어둡기만 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큰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재빨리 코너를 돌았고 그 어떤 순간보다 열심히 숙소까지 달렸고 다행히 신변에 문제는 없었다. 큰 길이라 따라오기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해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도쿄행 비행기에서 겪었던 위경련은 의미 있는 징후였는데 왜 무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총기 소지가 합법화되어 있는 나라여서 더욱 무섭게 느껴졌고, 그 이후로는 지하철역에서 내려서는 항상 불빛이 밝은 곳으로 이동하여 야밤에 달리기를 했다. 할렘가는 위험 하다는 생각에 새벽같이 방문해서, 반드시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나와야겠다고 철저한 준비를 했건만 밤길은 왜 조심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사고라는 것은 늘 대비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여행자가 할렘가를 가는 이유는 대체로 뉴욕 양키즈 구장 방문 아니면 브롱크스 동물원을 가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뉴욕 양키즈 구장에서 메이저리그 경기가 있었다면 관람했겠지만 그 당시 아무런 경기가 없어 그곳은 가지 않았고, 브롱크스 동물원만 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동물원에 걸맞게, 한국에서는 우리 안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동물들이 산책로 여기저기에 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처음 들어보는 동물들의 향연이었다. 동물 백과를 한 번에 보는 느낌이었고, 동물원의 절정은 사파리 투어였다.


 사파리 투어를 하려면 에버랜드 사파리에서 버스를 타는 것처럼 트레인을 타야 했다. 트레인과 사파리의 거리는 대략 30~50m 정도였던 것 같다. 트레인을 탈 때까지만 해도 뭐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싶었는데, 트레인이 이동한 후 1분도 되지 않아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TV에서 보여주는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던 아프리카 사파리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를 단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아프리카의 그 때 묻지 않은 태초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 속에 있는 동물들과 직접 교감할 수 없었지만, 그들 역시 아프리카 초원에 그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닐까 싶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동물원이 그 나라의 국력의 지표라더니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대 동물원은 런던 동물원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국주의 시대에 국력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동물원이 아닐까 싶었다. 당시 식민 지배에 대한 우월감과 정복감을 표출하기 위해 식민지의 온갖 진귀한 것들은 동물은 물론 유물까지 모두 훔쳐 가지 않았는가. 미라를 보기 위해서는 이집트가 아닌 대영박물관을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을 보기 위해선 뉴욕을 오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이 같은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는 나라의 사람들과 미래에는 경쟁할 수 밖에 없는데, 누군가의 것을 약탈해서 후손들의 경쟁력은 높아지는 수순이 계속 반복될 것을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단 동물원뿐만이 아니라, 뉴욕 현대 미술관이나 각종 진귀한 유물들이 전시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리고 월가는 물론 그 속에 있는 증권거래소를 보며 받을 수 있는 자극은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고, 급작스러운 뉴욕 여행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소태처럼 쓴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2020년, 2021년 달력은 공휴일이 암울할 정도로 없기도 하고, 2020년 현재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로 해외여행은 아주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더 나은 선택을 했음에도 코로나 시대에는 그것이 마냥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아 씁쓸하다. 하루빨리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 종식 선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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