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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Oct 06. 2023

위험해도 멈출 수 없는 도전

아이가 첫 아나필락시스를 겪었던 것이 두 돌 무렵의 마카오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 이후로는 겁이 나서, 또 코로나로 인해 집콕이 일상화되어서 해외여행을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7살 여름, 남편 친구 가족이 베트남 여행을 제안하면서 몇 년 만에 큰 용기를 내어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이가 심한 알레르기가 있으면 여행을 가는 것이 큰 도전이 된다. 국내 여행조차 큰 병원 없는 시골로 갈 경우 만약에 아나필락시스가 갑자기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되어 망설일 정도다. 실제로 평창으로 여행을 갔을 때 '비건 인증'이라고 써있는 초콜릿이었음에도 몇 조각 먹은 아이가 전신에 두드러기가 올라와 혼비백산 한 적이 있다. 만일을 위해 챙겨온 항히스타민제를 여러 번 먹이고 수 시간 동안 아이 상태를 체크하며 마음 졸여야 했다.


그러니 베트남 여행은 사실 크나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나마 글로벌 체인을 갖춘 5성급 호텔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호텔 뷔페나 레스토랑은 알레르기 유발물질 표기가 잘 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만약 표기가 없어도 문의하면 직접 주방장에게 물어보고 따로 조리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점은 감수해야 한다.


혹시 몰라서 항히스타민제도 1병 통째로 챙기고, 스테로이드와 에피네프린 주사(젝스트)도 2개 챙겼다. 햇반과 블럭 된장국,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짜장라면과 맵지 않은 사골라면도 챙겼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롯데마트 경기도 다낭점에서 구매하기로 했다. 




서로 비행기 스케줄이 달라 우리 가족이 먼저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기다리며 잠시 카페에 앉아 있는데, 망고빙수 사진이 붙은 메뉴판이 보였다. 대부분의 망고가 들어간 메뉴는 연유시럽을 넣기 때문에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에게는 매우 위험한 메뉴다. 하지만 남편은 걱정 말라며 직원에게 아이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 직원은 얼음과 기타 모든 것을 뺀 생망고를 예쁘게 썰어 접시에 한가득 담아 가져다 주었다.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케어 덕분에 신선한 망고의 맛이 한층 달게 느껴졌다.


수영장을 보고 애가 탄 아이가 하도 보채서 옷만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수영장 한켠에는 스낵바가 있었는데, 나와 아이가 수영하며 놀 동안 남편이 한참이나 스낵바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솜사탕에 우유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 만들어달라고 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솜사탕이 안 예쁘게 만들어졌다며 서비스로 1개를 더 주었다고 했다. 물놀이 하면서 먹는 이가 아플 정도로 달콤했던 솜사탕은 더운 날씨와 만나 실시간으로 녹아내렸고, 끈적하게 손에 묻혀가며 신나게 먹은 아이는 아무런 알레르기 반응 없이 무사했다.


물놀이 후에는 가지고 온 라면을 끓여 맛있게 먹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나가기 싫다는 아이를 위해 룸서비스로 쌀국수를 주문했다. 전화 상으로 알레르기 여부를 미리 밝히고 확인을 부탁했더니 쌀국수에는 우유, 계란 성분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닭고기 쌀국수, 소고기 쌀국수 모두 맛있게 먹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음 날에는 도착한 남편 친구 가족과 함께 호텔 내 식당을 방문했는데, 알레르기에 대해 설명하니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직접 주방장에게 물어보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주문해 먹은 게살 볶음밥은 너무나 맛있어서 또 다시 방문해 먹을 정도였다. 레스토랑 내 냉장고에서 팔던 라임이 들어간 아이스바도 성분 표기가 잘 되어 있었고, 덥다고 연신 아이스크림을 찾던 아이는 만족스러워하며 먹었다.


다음 날에는 바나힐에 방문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한없이 높이 올라가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는 '죠스바'를 만났다. 우유, 계란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그것도 이 높은 곳에서 만나다니. 하나를 다 먹고도 또 먹고 싶다고 해서 2개를 먹었다.


그 다음날 스케줄은 호이안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더위는 상상초월이었고, 우리는 '에어컨 쌩쌩'이라는 한글이 적힌 가게가 보이자마자 재빨리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커피 뿐만 아니라 꼬치와 다양한 메뉴가 있었고, 배가 고팠던 우리는 로컬푸드는 위험하니 호텔음식 외에는 가급적 시도하지 않겠다던 결심을 깨고 파파고를 켜 직원에게 성분을 문의했다. 어설픈 영어보다는 베트남어로 직역해주는 파파고가 훨씬 더 정확한 소통이 가능할 것 같았다.


우유, 계란, 치즈, 버터 그 무엇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확인을 받고 주문해 먹은 꼬치와 덮밥은 정말 맛있었다. 정제된 느낌의 호텔음식과는 또 다른 현지 느낌 가득한 풍미였다. 3번이나 추가주문을 해 배불리 먹고는 만족스럽게 식당을 나섰다.


4박5일간의 여행에서 이렇듯 다양한 음식을 먹고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가기 전에는 사실 걱정도 되고, 현지 사정이 어떨지 모르니 막막함과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막상 가서 부딪쳐 보고 찾아보니 먹을 수 있는 음식들도 있었고, 조심스럽게 다니다 보니 귀국하는 순간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해서 못할 일은 없어. 다만 조심하면 되는거야"라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알레르기때문에 위축되기 보다는 순간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찾고, 실컷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을 추억했을 때 "나는 알레르기 때문에 못하는 일이 참 많았어"라고 기억하기 보다는 "알레르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해봤어"라고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제 다음 달이면 나와 아이는 필리핀 세부로 한 달 살기를 떠난다. 수영장이 딸려 있는 어학원을 예약해 아침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실컷 수영을 하게 만들어줄 참이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얼마나 신나할지 기대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혼자서 오롯이 아이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이번 다낭 여행을 마치고 온 뒤 우리가 안전하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세이프 알레르기' 카페에 공유했다. 아이와 여행을 가고 싶어도 걱정되어 망설이던 다른 분들께 도움이 될까 해서다. 나도 늘 새로운 음식을 도전할 때면 '세이프 알레르기'에 검색해 같은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를 둔 부모님들이 미리 경험해보고 올린 글들로 도움을 받곤 한다.


세부 한 달 살기 경험 역시 하나하나 글로 남길 계획이다. 알레르기가 어쩌다 제멋대로 우리 아이에게 찾아오고 내 삶에 들어왔지만, 결코 의미없이 머물게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면 나와 아이와 우리 가족이 겪는 이 모든 일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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