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20대 때는 엄청 싫어했었다. 알아서 병이 되더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굳이 몰라도 될 불편한 진실들도 파고들곤 했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파악할 수 있다는 착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안고 가야 하는 것이 곧 결혼이고 육아였다. 나름 나랑 잘 맞는 사람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슬리는 부분을 간혹 보여주는 배우자(물론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췌 왜 우는 것인지 왜 그치질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아기. 게다가 왜 생긴 것인지, 왜 하필 내 아이에게 있는 것인지 모를 알레르기까지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총집합이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한다. 100% 이해할 수 있는 일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예전과 달리, 결혼과 육아를 겪으면서 포기하는 것이 곧 지혜라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냥 안고 가는 것, 불가능한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데 쓸 에너지를 차라리 지금 이 순간 조금이라도 나와 가족에게 도움 될 일을 찾는데 쓰는 것이 배우자이자 엄마로서의 역할인 것 같다.
100%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100% 내가 인정할 때까지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나의 권리이자 그것이 곧 똑똑하게 제 이익 챙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간혹 만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현재 불가능한 상황에는 눈과 귀를 닫아버리고 반복적으로 "나는 이해가 안돼,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해답을 내놔"라고 말한다. 예전의 나도, 아니 지금도 가끔은 내게도 있는 모습일 것이다. 내가 조금도 손해봐서는 안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 이렇게라도 내 의견을 세게 밀고 나가지 않으면 나는 한 없이 뒤로 밀려나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남들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실제로 이것이 내게 손해일지 장기적으로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일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당장 아파서 열이 펄펄 끓는 사람에게 10년 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보라고 한다면 가능할까? 당장의 아픔부터 낫고보자는 생각 뿐일 것이다. '누가 나한테 관심 좀 가져달라, 나 좀 알아달라'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마냥 손가락질 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기는 일들이 약간 더 많아졌다.
어차피 아는 만큼만 보이고, 받아들일 수 있다. 수포자인 나한테 많은 선생님들이 아무리 수학을 가르쳐줘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듯이.
하지만 일단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생겨난 애정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부분들까지 감싸줄 수 있다. 마치 모자란 내 수학점수를 다른 과목 점수로 감싸 평균점수를 높였던 것처럼.
알레르기 때문에 음식에 늘 제약이 따르는 우리 아이도, 먹는 행복 대신 다른 행복들을 더 많이 늘려줘서 행복의 평균치를 높여주려 한다. 어차피 모든 것이 다 완벽하고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도, 아이도, 우리 가족도 행복하다. 알레르기 따위 없는 다른 누구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