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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Sep 24. 2023

나를 압도하는 것들을 만났을 때

모두 똑같은 흰색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 그리고 검정 하이힐을 신고 내 번호가 불리기를 초조히 기다린다. 대여섯 명이 쪼르르 들어가 일렬로 공수 자세를 하고, 벌어지는 종아리를 딱 붙여 일자 다리로 보이게끔 힘을 준다. 내 차례의 질문을 기다리며 다른 지원자들이 대답할 동안 광대뼈에 경련이 나도록 미소를 유지한다. 별로 어려운 질문들도 아닌데,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겨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 속 대답을 이리 꼬고 저리 꼬아보며 고민하다가 결국 내가 들어도 시원찮은 답변을 하고 만다. 결과는 언제나 불합격.


20대 중반 무렵 나는 승무원이 되기 위한 취업 준비를 시작했었다. 그루밍부터 답변까지 사실 뻔한 틀 안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실제로도 경쟁률이 엄청났었다. 국내 항공사부터 해외 항공사까지 여러 차례 열심히 준비하고 면접을 보았지만 모두 불합격이었고 그럼에도 또 도전하고 도전했다. 


그때는 승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그 목표가 나를 압도했던 시절이었다. 승패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면접관들에게 있고, 나는 아무리 애를 써봐야 그들의 눈에 띄기는 커녕 수많은 개미떼 중 한 마리처럼 존재감 없는 N번째 지원자일 뿐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상황, 뭔가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면접관들이 원하는 것과 나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압도된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가 내놓는 답은 모두 거부당하고, 나를 짓누르는 너무 큰 존재 밑에 깔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결국 우연히 뜬 기자 공고에 지원했다가 덜컥 한 번에 합격하면서 내 승무원 취업 도전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뒤로도 수년간 공항에서 마주치는 승무원들을 보면 마음이 아렸다. 왜 나는 안 됐을까...저들에게 있고 내겐 없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은 누가 시켜준다고 해도 아마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준비생 시절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타고난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서비스직 스트레스를 감당해낼 수 있는 성향의 사람도 아니다. 처음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잘 견디다가 누적된 스트레스가 어느 순간 폭발하며 모든 것을 내던졌을 것이다. 같이 준비하던 친구들도 나에게 "너는 이 직업과 잘 안맞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아닌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보란 듯이 해내고 싶었던, 나를 압도했던 목표였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대가 아니고, 각각에게 주어진 재능들도 다르다. 내가 갖지 않은 재능이 필요한 일을 자꾸 도전하는 것은 글쎄, 후회하진 않지만 참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 때로 돌아가라고 해도 나는 또 도전할 것 같다. 그 도전 과정에서 울고 웃고 노력하며 얻은 지식들, 그리고 애티튜드, 함께 불합격의 슬픔을 맛보고 때론 합격한 친구들을 축하하고 보내주며 쌓은 추억과 좋은 사람들이 여전히 내게 남아 큰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압도당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피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벗어나는 방법은 자의든 타의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떠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성장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나를 압도하던 그 존재를 한 걸음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 내가 그 존재를 힘겹게 감당해내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근육이 붙고 단단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알레르기 역시 나에겐 너무 압도적인 존재였다. 문제는 내가 이걸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도, 다른 길을 갈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커다란 바위에 깔린 듯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그 상태에서, 나는 바위를 한 번에 번쩍 들어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이 바위를 굴리며 내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낫게 할 수 없다면 그냥 함께 걸어가는 수 밖에. 내가 거부하고, 없애고 싶어한다고 해서 없앨 수 없는 존재라면 애쓰는 마음은 좀 내려놓고 그러려니 하며 반려바위(?)인 것처럼 굴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다 보면 이 바위가 닳고 닳아서 점점 작아지지 않을까. 어딘가에서는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기적도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딱히 기적이 없다 해도 아마 바위 굴리는 노하우 정도는 점점 늘어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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