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대여해 준 상주복은 구렸다. 퀴퀴한 찌든 내가 딱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은은하게 역했다. 조선시대 상복은 삼베로 만든 흰색 의복이라는데, 어쩌다 우리는 아직까지 1934년 조선총독부의 의례준칙을 고수하며 보기만 해도 암울한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는지 모르겠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고, 공간 전체가 음산하게 풍기고 있는 꺼림칙함을 털어내고 싶어 장례식장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장례식장 바로 옆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던 요양병원이 어깨를 맞대고 붙어있었다. 두 개의 건물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두 건물의 생김새는 하나의 건물과 다름없었다. 자재며, 디자인이며, 낡은 정도며. 처음부터 함께 설계된 것이다. 심지어 요양원과 장례식장은 같은 주차장을 쓰고 있었다.
장례식장(죽음)이 바로 옆에 바싹 붙어있는 요양원(죽어감).
저 멀리 요양원복을 입고 걸음보조기를 끌며 산책하시는 할머니 두 분이 보였다. 장례식장을 등지고 걷고 계셨다. 애써 돌아선 등이 처연했다. 우리 할아버지도 산책을 하실 때 이 장례식장을 보셨겠지? 요양원을 갑갑해하셨던 할아버지. 당신이 자신이 요양원을 떠나는 날은 옆 건물 장례식장 1층 안치실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다 마지못해 어렴풋이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82세.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6년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심근경색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보다 마지막 6년 때문에 마음이 애처롭다. 내가 긴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죽음 자체라기보다는 '죽어감'일 것이다.
처음에는 의식이 또렷해 자유롭게 외출이 가능한 1층 병실에 계셨다. 손녀, 손주들과 외식도 하고 차도 마셨다. 그런데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할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6년째 되던 올해, 섬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치매로 급하게 진행되었다. '동두천에 가야 해.' 하시며 요양원을 도망쳐 무작정 걸으셔 실종될 뻔했다. 그 무렵 할아버지는 돈 100만 원이 없어졌다며 매번 하소연하셨는데 장례를 마치고 보니 할아버지 지갑에 100만 원이 그대로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4층 폐쇄병동으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몇 달 후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운동도 하고 관리하면서 지냈으면 할아버지도 좀 더 사셨을 텐데.' 하셨다. 그런데 할아버지 입장에서 '운동해서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이유나 희망을 가지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요양원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이미 사회적으로 한 번 죽은 상태와 다름없었다. 무언가가 서서히 할아버지를 죽이고 있었다.
대소변을 가릴 수 있었던 할아버지였지만 요양병원 측은 폐쇄병동에서는 무조건 기저귀를 차야 한다고 못 박았다. 기저귀를 하루에 몇 번이나 갈으셨을까? 그때마다 수치스러우셨을 것이다. 엄마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가려고 했을 때도 요양병원 측은 외출이 잦아지면 요양병원 생활에 적응이 어려워진다며 불허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서둘러 가셨다고 느낀다. 같은 병실에 있던 룸메이트가 사라질 때마다 당신도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처지라고 느끼지 않으셨을까? 사생활이랄 것이 없는 그곳에서 자아는 흐려지고 머리에는 먹구름이 끼었을 것이다.
7월.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 깜짝 놀란 엄마는 그런 생각 마시라며 일갈했다.
8월. 할아버지는 엄마의 면회 신청을 모두 거부했다. 갖가지 반찬들과 간식들을 싸들고 요양병원 문 앞에 선 엄마는 무거운 마음으로 음식만 전달하고 돌아 나왔다.
9월 5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죽어감, 그 과정에 대해서도 함께 애도를 한다. 요양병원에서 할아버지가 겪으셨을 죽어감의 과정이 너무 쓰리고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