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유골함에 유골이 일단 섞이고 나면 고인의 것을 찾아낼 수 없다고 한다. 내가 가진 여러 특성들, 그러니까 유전적으로 '나'라고 특정할 수 있는 DNA는 화장을 하고 나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뼈인지 내 뼈인지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냥 다 모래알이다.
화장로에 나무관이 들어간 지 2시간 만에 항아리에 소복이 담겨 나온 할아버지 유골을 보면서 나는 그제야 실감을 했다. 아, 할아버지가 진짜로 돌아가셨구나. 이제는 '고주성'이라고 부를 게 이 세상에 없구나.
할아버지 유골을 받아 들며 읊조린다. 내 장점뿐 아니라 약점들까지 모두 소중하다. '나'라고 특정할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것들이 있다. 부족하고, 미흡해도 그것은 하나뿐인 나를 이루고 있기에 금쪽같다. 얼른 수정하고 보완해서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 헤르만헤세, <데미안>
융심리학식으로 말하자면 개성화이다. 자아(ego) 실현이 아니라 자기(self) 실현. 할아버지 유골을 받아 들고 나서야 나의 그림자를 처음으로 매서운 실눈이 아니라 정다운 초롱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유일회성(唯一回性)'이라는 단어가 보석처럼 박혀있는 시를 떠올린다. 천주교 신자인 박완서 작가의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책에 소개되어 처음 알게 된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이다.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 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싶다
박완서 작가는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의 죽음을 겪는 참척의 고통 속에서 또 한 번 이 시를 인용한다. 이 시를 읽고, 베개가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고 고백한다. 죽음이 왜 무시무시하고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논리로서가 아니라 폭풍 같은 느낌으로 엄습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나의 죽음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사랑과 기쁨, 고통과 슬픔, 체험과 인식 등 그만의 소중하고도 고유한 세계의 소멸이다.
1524년에도 나 같은 사람은 없었고, 3024년에도 나 같은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의미 없는 것은 '나'라는 사람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겠다. 가장 나답게 살 것이다. 나의 모든 면을 끌어안고 일부는 승화시키며 가장 최고 버전의 나(The best version of myself)로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