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정확하게는 풍채가 남달랐던 할아버지의 분쇄된 뼛가루를 보면서 비로소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참 싫었다. 엄마가 요점 없이 말할 때마다, 과장되게 눈을 찡긋하거나 무마용 웃음소리를 낼 때마다, 말을 주고받기보다는 쫓기듯 호다다닥 자기 할 말을 내던지고 달아날 때마다 엄마가 못나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경질적인 짜증을 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엄마는 결국 몇 번 울었다.
열 줌의 흰색 가루로 변해 질량도 부피도 난데없이 줄어든 할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만의 분위기, 냄새, 모양을 가진다. 둥글 뾰족 구불구불 어떠하든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 엄마의 모양이고 윤곽선이다. '아, 이게 우리 엄마지.' 하면서 엄마의 개별성을 인식한다. '나의 엄마'라고 특정할 수 있게 해주는 그 특징들이 반갑다. 엄마는 고유한 하나의 세계다. 박완서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따라서 아무하고도 뒤바뀔 수 없는 그만의 소중한 세계를 뜻한다.
나는 엄마를 하나의 포도송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포도를 사 오면 달착지근하게 잘 읽은 새콤달콤한 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알도 있고 무른 알도 있다. 그 모두를 포함한 것이 '포도'다. 심지어 먹지 못하는 꼭지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한 송이의 포도가 완성된다.
포도를 부분 부분으로 쪼개서 알알이 다른 것과 비교하며 잘남과 못남을 구별하는 것은 무가치하다. 포도알 하나하나를 각각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문제점을 찾고 지적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돌아본다. 몹시 시건방지고 오만한 태도였음을 깊이 반성한다. 선생질을 했다. 엄마라는 존재는 부분 부분을 떼어낼 수 있는 부분의 총합이 아님을 깨쳤다.
단점 또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나만의 색깔이고, 윤곽이고, 향기고, 온도고, 촉감이다. 심지어 단점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일방적 규정이다. 문제 삼을 때 문제가 된다. 문제로 만드는 사람이 문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일부를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고치려 했던 나는 이제야 화살표를 고쳐 잡는다. 엄마의 행동거지 일거수일투족을 문제 삼는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