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치르고 난 뒤 죽음이라는 화두가 늘 나를 따라다닌다. 곤히 자고 있는 두 살배기 딸이 숨소리를 확인하기도 하고, 옆에 누워있는 남편의 팔을 껴안으며 몸이 따뜻한지 확인한다. 요가 수련 후 손바닥 만한 공간의 나무장에 내 매트를 원기둥 모양으로 돌돌 말아 넣을 때면, 훗날 봉안당 어느 한 칸 안에 쏘옥 들어갈 나의 유골함을 떠올린다. 우연히 내 손등에 시선이 닿으면 '아, 이게 나와 평생 함께 할 뼈구나' 생각한다. '몫'이라는 글자가 순간적으로 고인을 뜻하는 故와 겹쳐 보여 고개를 휘휘 젓기도 한다. 운전을 할 땐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머리 위에 영정사진이 둥둥 떠다닌다.
자꾸만 찾아오는 죽음에 시달렸다. 물기가 다 날아간 일상을 보내던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시 한 편이었다. 작가 한강이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의 첫머리에 서문 대신 쓴, 즉 서시 격으로 실려있는 시 '운명이 나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이다.
운명이 나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은 죽음을 '운명'으로 표현한다. 내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나의 운명이 다가와 말한다. '안녕?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저승으로 가시 지요가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를 두고 마치 헤어졌던 쌍둥이가 다시 만났을 때의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죽음을 '사망' 혹은 '사멸'에서 '화해', '해방'의 이미지로 승화시켜 표현한 한강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정중하고 듬직한 위로를 얻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비참하거나 개탄할 일이 아니었다. 불행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한강의 시는 따뜻하고 순한 물로 나를 다정하게 씻겨주었다. 음산했던 몸과 마음의 냄새는 물에 다 씻겨 내려갔다.
사람은 모두 우연히 태어나 우연한 시기에 죽는다. 그저 자기의 운명을 살다 간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고, 나도 그럴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남편도, 내 딸도. 유일회성의 인생을 사는 우리. 각자의 운명을 끌어안고 살다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