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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너리 Sep 25. 2022

#1 프롤로그

한 남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 중략..)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저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 데미안 中 』 - 헤르만 헤세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모습과는 반대로 흘러가거나 예상치 못한 고난과 역경에 부딪혔을 때 자괴감과 회의감에 빠지고 고통을 느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 내면의 감옥을 만들고 그곳에 자신을 가둬둔 채, 한 없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처지와 인생을 비관하면서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기도 한다.


 나 또한 살아가면서 종종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내면의 감옥 속에 갇혀 절망과 고통만 가득한 이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 일시적인 방황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내면의 감옥 으로부터 빠져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제 끝이겠지 생각하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또 이곳에 갇혀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내면의 감옥의 어둠이 짙어지고 단순 일시적인 방황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며 시간이 해결해주지도 못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의 무한 루프 속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인생은 고통의 무한 루프 속에서 빠지기를 반복하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절망감과 상실감 그리고 어둠만이 존재했던 시기, 이 어두컴컴한 감옥 속에서 나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준 깨달음이 있었다.


 비록 완전히 이곳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한줄기 빛으로 인해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올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진정한 자유를 되찾게 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조금이나마 찾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생각은 바로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소설을 써 내려가는 주체는 남이 아닌 바로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 소설이 명작인지, 졸작인지, 그저 그런 소설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의 진리와 해답은 모두 자신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소설을 판단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잘 보이기만을 위한 인간관계와 처세술을 배우며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씌우고, 대학과 취직만을 위해 의미 없는 공부를 억지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망받는 대학과 직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자신이 속한 작은 사회의 요구와 기대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고 가정을 이루고, 노후를 준비하며 결국 생을 마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과연 남의 인생을 평가하고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삶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 또한 누구보다 사회적인 기준을 잘 따르며 살아간 사람 중 한 명이니까. 하지만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살아본 적 없이, 자신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 모두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지고 기준이라는 공장 안에서 찍어낸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만약 누군가 나에게 “너 자신으로 살아본 적 있니?”라는 질문을 한다면 당연하듯이 “아니오”라는 대답밖에 하지 못할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싫어도 사회적인 기준을 어느 정도 따라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는 동안에 한 번쯤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 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저볼 필요가 있으며 이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과 길을 고민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한 사람의 소설을 써 내려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명작의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새드엔딩이기도 하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우주 스케일이기도 하면서 방구석에서 고양이를 관찰하며 써 내려간 소재가 명작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 소재는 타인에게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자신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상상력을 토대로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로 써 내려가야 비로소 명작이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이 해피엔딩이길 바라고, 성공하고 돈이 많고 멋있는 주인공이길 바라고, 아름다운 상대와의 사랑 이야기이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태어날 때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었고 이 세상에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없었다. 이미 태어날 때 결정된 것들이다. 그러니 비록 내 인생 소설의 소재가 소설 첫 파트에서는 내가 원했던 방향과 조금 다를지라도, 앞으로 써 내려갈 전개에 대한 소재는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스토리가 새드 앤딩이거나 어두컴컴할지라도 충분히 명작이 될 수 있고 자신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가 명작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라 사실을 기억하라. 타인은 그저 여러분의 소설을 보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해석할 존재일 뿐이며,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아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는 올해로 32세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 남자는 그다지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며, 한 가지 특출 나게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똑똑하지도 않은 여러분과 같이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오히려 그는 여러분보다 무지했고, 무식했고, 용기가 없었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까닭은 적어도 이 남자는 사회적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자유를 갈망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남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속적인 기준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남자는 한참 부족한 사람이고 이 남자가 32년간 걸어왔던 경험과 스토리는 영화 같이 극적이거나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큰 영감과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기 한번 들어보고 판단해보시길 바란다.


내가 가장 사랑하기도, 증오하기도 했던,
내가 가장 그에 대해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던,
나에게 많은 영감과 깨달음 주었던,
지금 보다 앞으로의 인생이 더 기대되는,
삶의 의미와 자기 자신을 찾고자 고군분투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살아갈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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