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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Mar 08. 2023

미안하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나와 다른 모든 것에 연정을 품다

  모든 원천 문제를 유발하는 원인의 소재지가 결코 외부가 아닌 내 안 깊은 곳인 이유는, 통점을 유발하는 모든 데이터가 본디부터 기억된 채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곧 기억과 경험을 통해 생성된 모든 오류의 데이터 즉 통점의 촉발 요인을 하나씩 제거해 초기화시킬수록 순수한 영혼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평화를 주도하는 힘은 나를 붙들고 조종하고 있는 통증들을 하나씩 걷어내고 회귀한 내적 자유 안에서만 오직 발굴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념의 순번을 잘못 묶었다. 나 자신이 먼저 자유롭게 변화하면 세상의 모든 표면적 현상을 어떠한 판단이나 잣대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게 되고, 그런 자에게만 허락되는 통찰적 시야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뜻의 털 끝만큼도 알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상의 가변성 위에 나를 내맡기고 이리저리 휩쓸리기보다는 현상의 이면에 깃든 본질을 읽어내고, 그에 따라 절대 변치 않는 가치를 추구하고자 노력이라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한 무궁한 가능성이 '될 일'로써 허락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낮은 곳에서 겸허하게 받들기 위한 선을 행할 수 있는 순수성만큼 그에 합당한 책임이 지워질 뿐, 또 하나의 자기 드높이기 식 선행에 대한 욕심을 채우고자 먼저 세상을 제 입맛대로 '좋지 못한 곳'으로 전락시킬 필요야 없지 않겠는가. 

스스로가 세상을 창조해 낸 조물주 되시거나 중심에 선 주인공으로 타고난 신화적 인물도 아닌데, 일개 인간의 됨됨이에서 감히 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닐 것이다.

  가장 무난한 방식으로 쾌적함을 주는 개성은 단지 세상 속 기준에서 조화로운 것일 뿐, 선함의 절대 지표가 될 수 없다. 

대의명분이라는 콘셉트이나 인본주의적 콘셉트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 조화로운 형태의 역할성을 가질 수 있으나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대체로 평생 부조화한 것이 숙명이다. 하나님이라는 마에스트로께서 예술의 혼 불태우시며 심혈로 지어주신 대로 예측 불허에 상상초월, 마음껏 자유로운 모양새이다. 

그럼에도 내게 이질적이거나 몰이해하여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쁜 것' 혹은 '비정상'이라고 서로 적발하여 계속 규정해 나간다면 세상에 순수한 개성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한 사람의 억압된 모습과 개성적 모습은 서로 다른 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끼' 수준의 억압 요소가 곧 재미있는 개성, 인생의 활력이 됨을 나는 마침 제 때에 배우고 있다.


  대부분의 개성은 그러한 인간적 불완전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누군가에게는 매력이고 재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프고 불편한 양면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개성의 이면에 비치는 영혼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신 뜻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회개하여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자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고자 할수록 내 시야는 점차 기쁨으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것이다. 

가장 선한 사랑이신 그분을 향한 길을 걷는 과정에 놓인 영혼의 개성 중 아름답지 못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음을 온 가슴에서 벅차도록 느끼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면 그 길 권외에서 변화하지 못하는 불행한 자들의 억압된 개성은 순리를 거스르는 부조리한 것이기에 혐오스러운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내게 접촉된 부조리적 현실의 표상으로부터 안타까움이나 슬픔을 잠시 느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부조리성 또한 인간적 명철함의 기준에서 보는 하나의 표면적 현상일 뿐, 그 내부에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섭리를 심어두셨는지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가? 

부조리에서조차 내가 미처 알 수 없는 가능성의 무한한 신비를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몸서리를 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그 오묘한 진리를 수용하고 드높일 수 있는 방편을 내 개성의 나름대로 탐구하고 실증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다. 

가능한 낮은 곳에서 보고자 하는 자의 간곡함이 상달된 만큼 조금씩 시야를 트여 주신다면, 새롭게 보이는 만큼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할 입이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다양한 개성과 상황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아쉬운 마음을 가지는 것 까지도 '죄'라고 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다.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곧 '사랑의 책임'이라는 소명이라면, 그 소명이 허락된 자가 되기 위한 변화의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콘셉트와 진노하시는 콘셉트를 충분히 느끼고 분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게으르고 오만한 자의 닫힌 눈과 귀에서는 그조차 읽히지 않는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낭비하고 그러한 현재가 이어져 결국 미래마저도 과거에 얽매인 자의 삶은 피할 길 없는 암흑으로 물들어간다. 

자각의 여부를 떠나서, 종내 회개를 통한 구원을 위해 나아가기 위한 필연성으로 허락된 물리적 생의 근원적 이유에 어긋난 오류를 저지르며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도록 무기한 방치한다는 것은 정신적 자살과도 같은 행위이기에, 내 영혼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날개를 무참히 뜯어버리고 불가능의 땅으로 추락시킨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 

현재에 몰입된 모든 '될 일'로부터 불가지의 경우의 수는 나의 미래를 새롭게 연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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