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춘기의 기록
돌아보니,
처음으로 가출을 했을 때가
아마도 사춘기였던 것 같다.
고2에서 고3 넘어가던 시기 즈음이었다.
부모님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아침에 아빠 차 의자 위에 편지를 한통 남기고는,
치밀한 계획 하에, 옷도 다 미리 챙겨서는,
집을 나갔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가출이었다.
자취하는 친구들 집에서 3일간 먹고 자고 했고,
너무 쿨하게도(?) 한동안 부모님의 연락이 아예 오지 않아서,
핸드폰을 껐다 켰다, 연락을 기다리지 않는 척 밤낮으로 기다리다가,
3일째 되는 날, '어디냐, 돌아와'라는
엄마아빠의 따스한 문자에
못 이기는 척 집으로 돌아갔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엄마아빠의 문자도,
3일 정도 기다렸다 보내자는
두 분의 계획이셨던 것 같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한 부모님의 말에
스르륵 마음이 녹아버렸고,
나는 나의 십 대를 그렇게 보낼 수 있었다.
사춘기 가출의 기억은,
그렇게 3일 천하로,
딱히 조용하지도 대단하지도 않게,
끝나버렸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오춘기가 온 것 같다.
사춘기는 세상에 대한 의문이었다면,
오춘기는 나 스스로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나는 남들과 다른가,
내가 싫어하는 건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사람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을까.
사춘기는 부모님에 대한 반항으로 표출되었다면,
오춘기는 오롯이 나 스스로,
내 영혼에 홀로 부딪히고 또 부딪히는 과정이었다.
#1. 우리의 삶은 균질하지 않다, 저마다 복잡하고 다양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모두의 삶이 균질하게만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
꽤 긴 기간 동안 그렇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힘들어하면서 회사를 다니다가
누군가는 그만두고
누군가는 힘들게 힘들게 버티고.
그러다가 은퇴를 하고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고
한가로운, 또는 걱정스러운 노년을 보내고.
조금은 뻔해 보이는 삶을,
모두가 겪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쩌면 그 '균질함'에 미리부터 지쳤는지도 모른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대단하게 신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뻔한 삶이라니,
도무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주변 사람들의 삶을 더 들여다보니,
모두의 삶은,
비슷한 것이 단 하나도 없고,
모두 달랐다.
분명 나이 먹을수록 이직이 어렵다 했었는데,
마흔 중반의 나이에도 벤처투자라는, 완전히 새로운 직무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고,
육십의 나이에도 코칭이라는, 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렵기만 했던 '창업'에 뒤늦게 도전하여 오너가 된 사람도 있었다.
다들 신바람 나게 일했다.
불안하다, 망할 수도 있다, 는
다수의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노년에 유튜브를 시작하여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도 있고,
그 선생님과 인생 친구가 된 또 다른 내 친구도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엔 유명인이라는 게
딴 게 없을지도 몰랐다,
나 스스로 나를 드러내며 살면 되는 거지.
큰 수술을 의연히 견디면서
기운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도
몸짱이 된 친구도 있었다.
건강을 지켜야 한다, 운동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강박 같이 느껴졌었는데,
'건강한 몸'이 있다는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이혼을 선택하며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선배도 있고,
이혼 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아이를 낳고 사는 친구도 있었다.
힘들게 하는 가족들과 연을 끊고 해외 주재원을 홀로 나가버린 친구도 있었고,
저출산 사회에 대한 전 국민의 우려와 가끔은 선을 넘는 '고민되면, 일단 낳고, 후회해'라는 말도 안 되는 조언에도 꿋꿋하게 딩크를 선택하고 행복하게 사는 후배도 있었다.
가족을 이루고 꾸려가는 형태 역시도, 정말 모두 달랐다.
누구의 삶에 대해 '맞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누구의 삶에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은 균질하게 수렴되지 않는 것이었다.
저마다 아주 복잡하고, 정말 다양한 것이 삶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뻔하게만 느껴졌던 삶이,
조금은 더 감사하고 재밌어지려고 한다.
내 삶은, 누구와도 똑같지 않고 특별할 것이다.
#2.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삶이 어느 정도 비슷한 건 아닐까,라고
느껴졌던 언젠가,
'그래도 내가 너보다 좀 더 살아봤잖아, 내 생각에는...' 하며 누군가에게 조언하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모두가 어느 정도 비슷한 길로 간다면,
확실히 먼저 살아본 사람 말을 듣는 게
유리한 것이니깐.
그런데, 이렇게도 다양한 삶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조언한다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삶의 선택들에 대해 누군가를 납득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카페에서 까르르- 하고 웃는 옆 테이블에서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걸 봤다.
'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친구들의 말에,
'내 생각엔 이러이러하니까, 난 지금은 유학보다는 알바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하고.
그래, 나의 선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의 길을 알려줄 수는 없다.
오히려 정말 필요한 것은,
나 스스로 길을 찾는 것.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
삶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그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 선택은,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하고,
어느 누구도 납득시킬 필요는 없다.
#3.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영혼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사를 찾아가니,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을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
남자는 영혼을 기다리기로 한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영혼이 숨을 헐떡이며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다시는 영혼이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리진 않았다.
- < 잃어버린 영혼 >, 올가 토카르추크의 그림책
가끔,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몸의 속도에,
영혼이 나를 잠깐 놓쳐버린 것일지도.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야 한다. 조바심을 내기보단, 그 자리에서 가만히.
이윽고, 영혼이 헐떡이며 우리를 다시 찾아왔을 때,
"나 왔어" 하고 빼꼼 문을 열고 돌아오면,
다시 함께 가면 된다.
그러나, 또 가끔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일들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마법처럼 잊히기도 하겠지만...
나는 지금, 괜찮지만 괜찮지 않다.
그래도, 된다. 오춘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