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사람이야기'라는 말
사람, 삶, 이야기
'결국은 사람이야기'라는 말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면 떠올리곤 했다. '결국은 사람이야기라는 말'. 여운의 그림자가 짙은 작품이라면 어김없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 라면 뭐든지 소중히 생각할 테지만, 이 말이 떠올랐다는 건 조금은 더 특별하다. 작품이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로 달리 말할 수 있어서다. 스치듯 마음에 스며드는 표현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가 위와 같은 감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이야긴 다음과 비슷하다. 주인공이 어쨌다가 다시 저쨌는데 알고보니 또 그게 아니라는 변주. 얘기가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지만 대부분 결국에는 늘 해피엔딩이다라는 결말. 이런 결말에 자주 노출 될 수록 이야기는 다 거기서 거기라 느껴질 터다. 뻔한 건 매력이 없다.
어릴적 이야기는 무지 힘이 세다고 하지 않는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의 어릴 적 이야기의 중심엔 권선징악이 자리했다. 악을 행한 사람이 결국에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 참고 참아 선을 지킨 사람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
이 힘 센 이야기 구조는 성인이 된 나를 여전히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에서 이런 흔하디 흔한 교훈만을 얻는 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슬픈 일이지 않을까 싶다.
진실한 이야기는 정해진 결말에 구애 받지 않는다. 이야기의 본질은 현실을 오롯이 비추는 것이고,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내가 서있는 현실에서의 주인공들은 결코 선하기만하지는 않다. 나 부터도 요즈음은 단순함이란 것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내 머리에 깊이 들어박힌 세 가지 단어가 있는데 바로 변명과 남탓, 시기다. 내 실수를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거나, 다른 이의 능력이나 성과를 어떤 줄타기?!가 있는게 아닐까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빳빳이 치켜 세운다. 주로 회사에 있을 때면 종종 일어나는 마음이다. 더 가관은 이런 불편한 마음을 마음으로만 간직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내것을 지키려고 욕심과 진실을 꼭꼭 숨긴 채 말이다. 현실에선 엄두조차 못내는 비겁함이지만 숨어서나마 마음을 조금 내보인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너무 걱정하려 하진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의 원형이 이런 모양이니까. 잠시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중일지라도 그 끝에 있을 또 다른 나는 나를 다른 모양으로 비추어줄테니 괜찮다.
작품을 볼 때 주된 전개가 '새드 스토리(sad story)'라면 몰입이 잘 되는 듯하다. 머리속에 기계적으로 입력된 해피엔딩, 권선징악이 아니라 실제적 현실은 비극에 좀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게 마음에 더 와 닿는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크나 큰 절망과 시련을 경험한 이야기에 유독 마음이 간다. 그렇다고해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 마음도 같이 힘든 것을 보면 그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마음이 쓰인다. 그것이 가공의 이야기든 현실의 것이든. 진실로 이 세상에 넘쳐나는 현실과 모습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절망하는 이야기.
최근에 읽은 어느 소설에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현실을 망각할 정신적 마약, 이야기는 무한히 제공되었다." (작별인사,김영하)
이 소설에서 위 표현은 이야기의 힘이 최면적인 것에 불과한 허상임을 강조하는 의미로 비유된다. 이야기는 진실한 것이 아닐뿐더러 인생은 고통이고 현실은 절망이란 사실을 가리는 것에 불과한 그저 '도피처'의 역할만을 한다는 의미로 꼬집는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모두 동의 할 수 없다. 달콤한 소릴 아무리 주입한다 한들 현실의 토대위에 있지 않은 이야기라면 금방 탄로 나는 법. 계속해서 사람을 이끌지 못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거기엔 희극이든 비극이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두 존재하며 각기 충분히 의미가 있다.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래서 인생이 비극이고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 사실도 처절히 느끼게 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그 비극에 맞서 대비하고 우리를, 서로를 지킬 수 있게 한다. 어려움을 극복한 이야기는 다른 이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건낸다. 그래서 사람의 이야기는 고귀하다. 우리는 더많은 이야기를 하며 듣고 접하며 그렇게 서로 나누어야만 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인간이 '생' 앞에서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 여실히 보여조는 소설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기 앞의 생의 주체자로 인식하며 살지만, 사실 생은 그렇게 창창하다거나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로자아줌마와 모모의 삶을 보면 우리 앞의 생은 자연과 사회의 법칙 앞에 무력하며, 이들과 같은사람에게는 더욱 더 가혹하기만한 현실을 보이고 있다.
"고통을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잖아요. 젠장, 다들 그러려고 결혼을 하는거래요. "(자기앞의 생, 에밀 아자르)
생이 우리를 파괴하는 거라면, 어쩌면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함께 할 순 있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이야기 처럼 서로 의지하며.
'결국은 사람이야기'라는 말, 모든 이야기를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치환 하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야기에 지나침은 없다. 이야기가 지닌 힘에서 알수 있듯 사람의 이야기가 구별없이 잘 소통되는 세상이라면 그 어떤 이야기도 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하루를, 인생을,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해진)결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보다는 '결국은 사람이야기'라는 말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듯 다른 이의 삶, 타인의 이야기! 그것을, 그것으로 내 삶을 비추어 가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게 더욱 의미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사람 이야기는 흥미롭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