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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Sep 04. 2021

생수통 그거, 제가 갈게요.

여자가 힘이 세지면 생기는 일

새로 운동을 시작할 때면 새삼 목표를 확인해보게 된다. 둘째 출산 뒤 100일째였던 지난 2월. 내 첫 운동 목표는 '통증 없이 제대로 걷는 거'였다. 30대 후반 두 번째 임신과 출산, 몸이 엉망이었다. 재활운동에 가까운 피티 수업을 석 달 넘게 받았더니 조금씩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15분 이상 걸으면 오른쪽 중둔근 인근이 너무 아팠는데 그 통증도 거의 사라졌다. 반년 넘게 지나 이제 30분 정도는 지치지 않고 기분 좋게 뛸 수 있게 됐다. 


다음 목표는 '힘'이었다. 돌이켜보면 힘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거 같다. 힘이 세야 한다거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거의 없고, 주변에서 그래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동네 축구, 길거리 농구 같은 '생활 속 운동'을 경험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막연히 '튼튼해졌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트레이닝 선생님께서 '힘이 좋아진다'고 표현을 바꿔주셨다. 운동을 하면서 내가 힘이 세졌다는 걸 집에서 삼다수를 옮기다 알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2리터들이 생수 6개 묶음을 옮기며 나도 모르게 데드리프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배에 힘을 딱 주고,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생수를 들어 올리며 엉덩이에 힘 빡! 가뿐하다.


전에도 생수통을 '옮기긴 옮겼다'. 사무실에서 대형 생수통을 허리 위로 들어 올려 손가락이 끼지 않게 똑바로 세워 꽂아두는 일, 그 행위에는 생각보다 담긴 이야기가 길다. 나보다 힘이 쎈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지만 그런 일은 자주 '약한 여자-도움이 필요한 존재'와 '강한 존재-도움을 주는 남자'로 치환돼 버린다. 성별을 빼고 담백하게, 힘이 강한 사람과 그보다 힘이 약한 사람으로 읽히면 좋으련만- 그러기는 여러모로 쉽지 않다. 생수통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매번 동원되는 힘 강한 사람은 또 무슨 죄인가. 그런 내러티브가 마뜩잖고,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해서 어떻게든 내가 해보려고 낑낑대며 생수통을 끌어올렸다. 그럴 때마다 힘쓰는 법을 몰라 자주 허리를 삐끗했다. 생수통과 씨름하고 있노라면 결국 누군가가 다가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모든 게 싫어 생수통에 물이 없어 보이면 아예 물 마시기를 포기한 적도 있다. 


여성 평균보다 작은, 참으로 '쬐깐한' 내가 힘을 키운다고 갑자기 보통의 남성만큼 강해지진 않는다. 그래도 이제 다시 사무실에 돌아간다면 생수통 정도는 번쩍 들어 올려 손쉽게 교체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존재에서 (목마른데 생수통 갈 힘이 없어 자리에 앉아 있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바뀐 것이다. 이 알량한 근육이 준 자유로움이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약한 여자' 내러티브에 미세한 금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그렇게 작은 흔적들이 쌓이고 쌓여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즐겁다.  


아, 참고로... 우리 사무실 생수통은 이제 정수기로 바뀌었다. 아무도 생수통을 갈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힘이 세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수통 하나 마음 편히 갈자고 모두가 근육을 키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해결'은 이런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수기에서는 심지어 얼음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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