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인도 이동수업 이야기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큰 아이의 8학년 겨울방학은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방학이 끝나는 대로 아이는 인도로 출국할 예정이었고 겨울 방학 두달 동안 출국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9학년(중3)이 되면 남인도지역에 있는 국제도시인 뱅갈루루로 가서 8개월간 어학연수와 문화탐방을 합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책으로는 배우기 힘든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도전의식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먼 타국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일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하는 쉽지 않은 그 기간을 부모들은 ‘군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부모들 사이에 아이들이 화자될 때면 주로 인도이동수업 전과 후로 나뉘면서 인도 수업 이후에 사람이 되었다는 말들도 있었고, 인도를 다녀온 아이들은 군대를 전역한 것 마냥 홀가분하면서도 묘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 둘을 보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인도를 가기 전과 후의 마음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의 생각이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만큼 인도이동수업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도전이었습니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엄마인 제 마음 속에는 기대감과 걱정이 서로 팽팽하게 저울질을 하고 있었 습니다. 어차피 다녀와야 할 곳이라면 눈 딱 감고 보내자라는 심정으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가도 왜 하필 멀고먼 인도에까지 가야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앞서기도 했습니다. 1기 선배들이 한 해 앞서 이동수업을 무사히 잘 마치고 오기는 했지만 막상 우리 아이를 인도에 보내고 8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떨어져서 지낼 생각을 하니 기숙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첫 일주일간 아이가 돌아오는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던 그리움은 이제 비교할 바도 아니었습니다.
전체 학년이 함께 이동 수업을 하는 것이라서 우리 아이만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씩이나 아이를 인도에 보내지 말까 고민도 했습니다. 학교와 친구들을 너무 사랑하는 아이는 우선 학교에서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좋았고 인도 생활에 대한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훨씬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불안해 할 때마다 오히려 저를 안심시키는 말로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는 출국에 필요한 비자와 모든 서류 절차를 마무리하고 학교에서 안내해준 목록대로 준비물들을 꼼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빠진 물건이 없는지 여러번 체크하다보니 준비물 목록 이외에도 추가적인 물건들이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유산균, 치실, 각종 영양제, 신라면, 튜브고추장, 참치캔, 간장, 김, 일년치 샤프심, 볼펜 지우개 등등 아이가 한국에서는 잘 쓰지도 않는 물건들 까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넣어주었습니다.
비행기 수화물의 무게가 30키로를 넘지 않아야 된다는 조건이 있어서 몇 번이나 짐을 풀었다 챙겼다를 반복했습니다. 짐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기내에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개인 백팩에는 캐리어에 미처 담지 못한 물품들을 넣었고 거기에다가 오케스트라 활동을 위해 바이올린과 기타까지 챙기고 나니 가뜩이나 키도 작은 아이가 짐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출국 당일 아침 공항에 하나 둘씩 친구들과 부모님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개교 이래 두번째로 인도이동수업을 떠나는 2기 아이들을 배웅하러 학교의 선생님들과 1기 선배들 그리고 학부모들까지 함께 나와 따뜻한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기념촬영과 따뜻한 환송회를 마치고 아이들은 부모님들께 큰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있을 탑승을 위해 출국 게이트에 줄을 섰습니다.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울컥한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있는데 1기 엄마 한분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들이 이미 작년에 인도를 다녀왔는데도 그때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모양입니다. 그 엄마의 우는 얼굴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씩씩하던 아이까지도 출국 게이트 앞에서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이별이 따로 없었습니다. 여기 저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누나의 출국을 슬퍼하는 한 초등학생 남자아이의 대성통곡하는 소리에 게이트 앞은 이내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별의 눈물 파티를 하고 나서야 아이들는 게이트를 빠져나갔습니다.
자정을 넘어 출발한 비행기는 약 7시간을 날아 싱가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인도 뱅갈루루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긴 시간의 여행이었습니다. 꿈같은 이별 끝에 도착한 뱅갈루루에서 가장 먼저 날아온 소식은 뱅갈루루 국제공항에서 아이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찍은 단체사진이었습니다. 밴드에 올라온 사진 속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한번 더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책임교사 한 분을 포함한 다섯 명의 인솔교사 선생님들의 책임감과 부담감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을 부모들을 위해 이동 경로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아이들 얼굴이 모두 나오도록 정성으로 사진을 찍어 밴드에 올려주셨습니다. 40명이 넘는 아이들을 인솔하는 일도 보통일이 아닐텐데 다시 그때를 떠올려 봐도 선생님들의 사랑과 섬김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생활하는 아이의 활짝 웃는 사진 한장은 그 어떤 청량제 보다 하루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제막 15살 남짓한 어린 아이들의 생활과 학습과 마음 상태까지도 일일이 챙기고 보살펴주셨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먹먹할만큼 감사한 마음입니다. 인도 뱅갈루루의 어학원에 도착한후 처음 며칠 동안 아이들은 숙소에서 여독과 긴장을 풀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한국에서 엄마를 위로하며 호기롭던 마음은 온데 간데 없이 딸아이에게 갑자기 분리불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대로 다시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가 자주 울었습니다. 밤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는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학원 기숙사 밖은 거리의 개들이 밤새 짖어댔고 생활관 창문과 천정에 붙은 모기떼는 밤이고 낮이고 아이들을 괴롭혔습니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가 향수병으로 잠못드는 밤이 길어질 수록 가족들은 애가 타들어갔습니다. 금산 학교에 있으면 데려와서 며칠 쉬게라도 했을텐데 인도에 있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때만큼 부모로서 무력함을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담당 선생님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서 할 수 있는 검사를 다 해보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뇌사진까지 모두 찍어봤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의사의 진단명도 단순한 향수병이었습니다. 그때 향수병이 참 무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일 저녁 불면증으로 잠을 못자는 아이를 위해서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에게 매일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도의 우편제도는 참 독특하고 체계를 알 수 없습니다. 편지는 빈번하게 사라졌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 번 보내면 도착하는데까지 한달이 걸릴지 두달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당장 오늘 집과 가족이 그리운 아이에게 손편지를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이의 메일 주소로 편지를 보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곳의 와이파이 환경이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데다 아이들은 개인 노트북이나 핸드폰이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어쩔 수 없이 손편지 대신 담당 선생님 이메일 주소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매일 이메일 편지를 출력해서 아이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핸드폰을 받는 날은 아이와 30분 동안 영상통화를 했습니다. 이 역시도 전체 학생이 동시에 통화를 하면 정전이 되거나 와이파이가 먹통이 되기 때문에 아이들 팀을 나누어 교대로 전화를 해야했습니다. 영상 통화 화면이 자주 끊기고 멈춰도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통화도하고 매일 보내주는 엄마의 편지를 읽으면서 아이는 조금씩 더 회복되고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두달 정도 지나자 이제는 인도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인도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열어보지 않는 이메일이 쌓이는 날도 종종 생겼습니다. 밝게 회복된 아이의 모습을 보며 선생님도 한번에 여러장의 편지를 출력해주시면 아이도 밀린 신문 보듯 한꺼번에 쓱 훑어 읽곤 했습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8개월이 마무리 될 즈음에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아이는 인도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아이는 자신의 삶에 작지 않은 도전을 넘어 단단한 모습으로 바뀌어갔습니다. 하루는 영상통화를 하는데 아이 얼굴이 얼굴이 멍게 처럼 울긋불긋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이유를 물어보니 망고 알러지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망고를 당분간 먹지 말아야 하는데 얼굴이 부었는데도 망고가 너무 맛있어서 안먹을 수가 없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습니다. 인도는 맛있는 망고가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큼지막하고 향기롭게 잘익은 애플망고를 말만 잘하면 1달러에 5개도 살 수 있습니다. 휴일에는 친구들과 가까운 망고농장이나 식료품가게에 가서 신선한 망고와 다양한 열대 과일을 사왔습니다. 망고비가 내리고 나면 바구니 가득 노란 망고를 가득 실은 상인들에게서 양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득 망고를 사왔고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노란 망고를 주말 내내 하루 종일 실컷 먹으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망고 뿐만 아니라 설탕을 뿌려 놓은 것 같은 달달한 수박과 사탕 맛이 나는 청포도 그리고 신선한 각종 열대과일 등으로 배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실컷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트에서 한개 만원이 넘는 빨간 애플망고를 보면 선뜻 사달라는 소리 대신에 인도에서 천원에 망고 사먹던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어학원 원어민 선생님 중 한분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힌두의 전통 결혼식 이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사라진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생활 속 깊은 곳곳에 빈부와 계층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브라만 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 교사를 비롯한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로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아이들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어학원 원어민 선생님의 결혼식은 며칠동안 그야말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볼거리였습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에서의 피로연 처럼 본예식 전에는 리셉션이라는 행사가 진행되는데 신부가 하객들 앞에서 소꿉놀이를 하듯 다양하고 재미있는 의식을 치릅니다. 화려하고 이색적인 힌두 전통 결혼식은 아이들에게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결혼식 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화려한 색깔들로 풍성하게 차려진 다양한 음식들은 그 종류를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강한 향신료의 향 때문에 처음 접하는 아이들은 입맛에 잘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향신료에 큰 거부감이 없는 아이들은 맛있는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 중에 하나였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는 동안 음식이 매우 중요한데 하루 세끼 어학원 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어학원 식당의 셰프들은 주로 네팔인들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의 김치부터 시작해서 웬만한 한식은 모두 요리할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 식단도 탄두리 치킨이나 커리같은 인도음식처럼 아이들이 거부감 없이 먹을 수있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주로 한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선생님들도 마음껏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 중 한분은 하루 세끼 식사 시간마다 자신의 식판에 담아온 음식을 맛깔스럽게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셨는데 매번 올려주시는 다채로운 음식사진이 특히 엄마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오늘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사진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음식의 질이 정말 좋아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인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영화산업입니다.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인도에는 발리우드가 있습니다. 인도인들처럼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보고 또 많이 만드는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제작하는 나라라고 인도인들도 스스로 자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인도영화에는 특징적인 것이 있는데 대부분의 영화에서 단체로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영화제작이 보편화 되어있다보니 특별히 전문 영화 감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지내던 어학원 근처에 인도의 엄청난 부자가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집이 얼마나 큰지 그 안이 영화촬영 세트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루는 그 집 주인이 어학원에서 지내는 우리 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마침 영화촬영이 있는 날이었는데 자신의 영화에 우리 학생들을 카메오로 출연시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어학원 분위기는 흥겨워졌고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그날 으리으리한 인도의 부잣집 구경도 하고 인도의 영화속 한 장면을 장식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슈가 있는 날의 밴드 스토리는 정말 풍성했고 한국에 있는 부모들도 같은 마음으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드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인도에는 우리나라와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부자들도 많지만 그런 부유한 저택에서 한 블록만 지나가도 거리에서 아이들이 손을 벌리고 구걸하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주말에 이따금 쇼핑몰에 갈때면 큰 거리를 지나가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런 빈부의 극심한 격차를 직접 눈앞에서 보게됩니다. 아이들은 한국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왜 그런 빈부의 격차가 생겨났는지, 왜 자신들이 그곳에 가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신들이 아는 것들 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그 외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생각의 씨앗들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뿌려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어학원에서는 지역의 중고등학교인 쉐마스쿨과 MOU를 맺고 문화를 교류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자매결연을 맺은 인도의 중학교를 찾아가는 날에는 아이들도 또래의 인도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한국의 아이들은 춤과 노래와 연극을 준비했고, 인도의 아이들도 전통 춤과 편지와 게임을 준비해서 하루 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은 금새 친해져서 한 번 방문 이후에는 서로가 다음 방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만났던 인도의 친구들과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머물던 남인도의 뱅갈루루에는 Christ University 라는 명문 대학이 하나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풍경은 교복입은 대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이 학교 뿐만 아니라 인도의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대학과 달리 기본적으로 3가지의 전공을 해야하고 수업시간도 한국의 고등학생들처럼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쉬지 않고 수업을 들어야 합니다.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은 한국 대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Christ University는 특히 경영학부와 IT 계열의 전공학부가 유명해서 인도 전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입니다. 아이들 학교의 1기 선배중에 한 명이 인도이동 수업을 다녀온 이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한 친구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다채로운 인도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4개월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중간 여행으로 남인도 여행을 떠납니다. 어학원을 벗어나 여행하는 일주일 동안은 공부나 다른 일정은 모두 잊고 오로지 여행에만 집중합니다. 관광지를 방문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마음껏 사진도 찍습니다. 호텔에서는 와이파이의 축복도 누리고 현지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생존영어 실력도 신나게 펼쳐봅니다. 8개월차에는 기말 시험을 마치고 북인도 여행을 하는데 기말 여행을 마무리하고 나면 곧바로 귀국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아이들이 어학원에서 거꾸로 숫자를 세며 매일 영상을 올려주는데 그때처럼 매일 매일 신나고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시간이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기말여행때는 남인도인 뱅갈루루에서 북인도 델리공항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이동해야합니다. 뉴델리의 시내 관광 후에는 National Museum 과 간디 박물관을 견학했습니다. 타지마할 견학은 북인도 여행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궁전 앞에서 저마다의 추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최대한 대칭을 맞추어 사진을 찍고 누구 사진이 더 완벽한지 비교해 보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인도에서 생활하던 8개월 동안 매일 편지를 쓰는 일 말고도 특별히 아이를 위해서 한 일이 한가지 더 있었습니다. 가까이 살면서 같은 학교를 보내는 엄마들과 매주 만나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잠을 못자거나 아플 때 함께 이야기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소식을 나누고 서로의 아이들을 위해 함께 걱정해주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인도에 있는 8개월 이라는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첫째가 인도에 다녀온 후 다시 4년 뒤 둘째의 출국이 다가왔습니다. 첫째 아이때 보다는 한결 불안한 마음은 덜했지만 둘째 아이 역시 나름의 기대감과 걱정이 공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삶 가운데 놓인 도전 앞에서 아이들이 홀로 고군분투 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부모로서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두 아이의 인도 이동 수업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실패와 실망을 경험해 보기도 전에 부모가 만들어 놓은 보호막 속에 어떤 실패와 실망도 경험해 보지 못한다면 자라는 동안 얼만큼 자립심을 키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면이 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의 마음은 모두 동일하지만 실제로 그런 마음을 소유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배움터가 반드시 아이들의 성장 과정 가운데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위한 교육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단단한 마음과 정신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