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은 얼마나 간격을 두고 지어야 할까? 건물을 너무 가깝게 지으면 건물 소유자들끼리 다툼이 발생하기 쉽다. 민법에 의하면 건물은 경계로부터 반 미터(50㎝) 이상 거리를 두고 지어야 한다(물론 건축법에 별도 규정이 있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무생물체인 건물들끼리도 이렇게 최소한의 거리를 둔다.
이성과 감정의 혼합체인 사람끼리는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서로의 인격적인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지켜야 할 기본적인“예의와 배려”의 적정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토지의 경계에 대한 민사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변론하며 토지 경계가 아니라 변호사끼리의 기본적인 경계선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느 날 나와 상대방 변호사가 변론을 위해 재판정에서 판사 앞에 나란히 섰다. 원고 측 변호사인 내가 왼쪽에, 피고 측 변호사는 오른쪽에 섰다. 요즈음은 재판을 시작할 때 판사가 당사자와 변호사의 신분을 확인하면 바로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변론한다.
예전에는 모두가 판사 앞에 서 있는 자세로 재판을 해야 했었다. 그는 자신의 의뢰인과 비슷한 연배처럼 보였다. 하얀 머리로 가득한 그의 모습을 보니 어림잡아 70대는 넘은 것 같았다. 그 당시에 내가 40대 중반이었으니 그는 나보다 20세 이상 연장자였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피고는 절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원고 혼자 착각해서 그런 거예요. 지금 원고가 거짓말 하고 있어요. 원고! 그렇지 않아요?”
그가 내 쪽을 한번 흘낏 바라보더니 판사 앞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약간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말하는 내용도 영 귀에 거슬렸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와 표정은 더했다. 마치 동네에서 길 가다 만난 낯선 이웃에게 그냥 자기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퍼붓는 식이었다.
내 고객인 원고는 공장을 짓기 위해 경기도에 있는 피고의 토지를 몇 십억 원에 매수하였다. 그런데 땅의 경계가 문제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수한 땅의 경계 안에 도로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도로 면적이 200평 정도나 되었다.
매매 가격으로 환산하면 몇 억 원은 되었다. 고객은 억울한 마음이 들어 피고를 상대로 그 도로 면적에 해당하는 금액을 다시 반환하라는 소송을 피고를 상대로 제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건의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재판정에서 피고 측 변호사의 변론 태도가 상식을 넘어섰다. 변호사끼리는 보통 서로 예의를 지킨다.
아무리 사건이 치열해도 변호사의 인격에 대해서는 절대 공격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같은 직업인으로서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법리적인 쟁점 때문에 변호사간에 심하게 논쟁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법적인 문제에 국한해서 다투기 때문에 재판정을 나와서도 변호사끼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예의가 전혀 없었다. 나이가 자신보다 좀 어리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물론 변호사는 당연히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긴 해도 변호사가 당사자인 의뢰인은 아니다. 재판이라는 공적인 절차를 수행하는 전문 직업인이다.
설사 의뢰인이 사건의 이해관계 때문에 감정적으로 나온다 해도 이를 대리하는 변호사는 냉정하게 사건 자체에 집중하여 사실 정리와 법리 주장으로 상대방과 싸워야 한다.
변호사가 의뢰인과 동일시되어 재판을 수행하면 변호사 없이 당사자끼리 재판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재판정이 싸움판이 되기 쉽다. 재판정에서 변호사가 그런 태도로 나오면 재판장이 “변호사가 무슨 당사자냐?”라고 나무라며 중간에서 제지하기도 한다.
땅의 경계가 문제 된 소송에서 변론하는 상대방 변호사의 태도가 완전히 경계선을 넘어섰다.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여러 재판을 수행했지만 이런 안하무인의 변론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나이 지긋한 변호사는 오랫동안 경륜이 쌓이며 법적인 쟁점에 대해 차원 높은 변론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피고 변호사의 그 무례한 태도를 애써 무시하고, 일단 냉정하게 법적인 주장을 정리해서 변론했다.
“ 원고는 이 땅을 평당 얼마로 계산해서 샀습니다. 실제로 평당 금액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매매 금액이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땅의 경계도 매매 당시에 피고가 경계를 가리키면서 이 부분만 도로라고 하여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나중에 측량해 보니 피고 말과는 달리 200평이나 도로로 편입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도로 면적은 원고가 사용할 수 없으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부당이득으로 반환하여야 합니다.”
재판이 끝난 후 점잖은 내 고객도 상대방 변호사에 대해 상당히 분개했다. 재판정을 나와 일단 조용한 곳으로 고객을 데리고 갔다. 일단 당사자의 고조된 감정을 누그러뜨린 후 사건의 향방에 대해 설명했다.
원고가 이 사건에서 이기려면 매매 방식이 “수량을 지정한 매매”로 인정되어야 한다. 즉, 매매가를 평당 얼마로 계산하는 식이다. 그런데 원고는 매매 계약서를 작성할 때 평당 얼마라는 기준을 서류에 기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매매금액을 보면 평당 얼마로 계산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매매 금액이 도저히 나올 수 없었다.
그런데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있었다. 설사 매매 계약서에 평당 금액이 기재되었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수량 지정” 매매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수량의 기재가 형식적이고 매매 당사자는 실제 토지의 현황과 모습을 보고 그 현황을 기준으로 매매를 했다면 평당 금액의 기재는 별 의미가 없어진다.
대충 이런 내용이 이 사건의 법적인 쟁점이었다. 상대방 변호사가 어떤 태도로 나오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피고를 상대로 부당이득 반환을 청구하는 원고로서는 이 어려운 법적인 쟁점을 풀어야 했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재판장은 이 사건 매매가 “수량 지정” 매매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여 원고가 패소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 판결에 동의할 수 없는 면이 많았다. 내용만 보면 대법원까지 올라가 다투어 볼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고객이 더 이상 상대방과 다투고 싶지 않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사건이 종결되었다.
나로서는 무척 아쉬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망각의 강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상대방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호사로서 지켜야 할 “인격적 예의나 배려”의 적정 거리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변론했던 그 모습은 잘 잊혀지지 않았다. 이후 그 변호사를 법정에서 다시 마주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