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니다 보면 업무 성과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현장 대응을 잘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서류 작업에 강점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일을 잘 한다'이라는 표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겠지만 결국에 회사라는 곳은 보고서를 잘 쓰는 사람이 유리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춘 회사라고 하면, 직급과 직책에 따라 역할과 책임을 구분하고 거기에 맞는 업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경험과 결과는 객관화, 체계화, 서류화되어 최종적으로 보고서로 작성된다. 우리는 보통 '여행이 끝나면 사진만 남는다'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업무가 끝나면 보고서만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인은 결국 보고서로 평가받는다.
보고서를 보고도 그 회사의 문화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회사 욕이 빠질 수가 없는데, 그중에서도 답답한 보고 문화는 단골 소재다. 특히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옥상 위에 옥상 위에 옥상이 있는데 아무도 책임은 지지 않는... 진이 빠지는 의사결정 체계에 진저리 치며 도대체 사기업은, 특히 삼성은 어떻게 일하는지 물어보고는 한다. 그래서 오늘은 마포 H사와 삼성에서 느낀 보고 문화의 차이에 대해 써볼까 한다.
먼저 마포 H사는 전형적인 헬조선 기업 문화였다. 당시에 나는 기획 업무를 하면서 같은 기수 동기들에 비해 보고서를 나름 많이 썼다고 자부하는데, 심한 날에는 하루에 보고서 2개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보고서 하나를 쓰려면 평균적으로 A4용지 200장 정도를 썼으니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는 짐작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출근해서 보고서를 쓰고 고치고, 과장님과 팀장님께 첨삭 받고, 다시 인쇄해서 고치고를 반복하다 보면 하루 종일 보고서 하나 뜯어고치다가 시간이 다 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날이면 날아간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이러려고 고생해서 취업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다.
마포 H사 보고서의 특징은 One paper를 강조하지만, 사실은 무수한 참고 자료가 따라붙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먼저 임원이 빠르게 업무 개요를 판단하기 위해 한 장짜리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임원의 질문이나 궁금한 사항에 대답하기 위한 추가 자료가 첨부되는 식이었다. 특히 상사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무능하고 제대로 일을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 마포 H사의 분위기에서는 추가 자료의 두께가 중요한 면피의 구실이 되고는 했다. 만약 상사가 물어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추가 자료를 뒤적이면서 비슷한 답변이라도 내놓거나, 또는 열심히 준비했으나 그 점에 대해서는 미비했었던 것 같다는 대답이라도 해서 위기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실에는 제본기가 있었고, 사장급 이상까지 올라가는 보고서에는 아예 첨부 자료로 책을 한 권씩 제본해서 준비하고는 했다.
당연히 실무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게 일을 하는 건지 서류를 정리하는 건지, 정작 중요한 실무는 못하고 아까운 시간에 보고서나 작성하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더 힘들 때는 기초 자료가 나에게 없을 때였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하는 업무라는 게 내가 하고 싶다고 혼자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고, 여러 부서가 협업해서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 상사의 질문 10개를 대비한다고 유관 부서에 자료 100개를 요청하니 불만이 가득했다. 만약 본사에서 진행되는 일이라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자료 요청이 본사에서부터 여러 부서와 담당자를 넘고 넘어오다 보면 실제 데이터를 관리하는 지방 공장 담당자는 1,000개, 10,000개의 자료를 준비해야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