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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훈 Oct 21. 2019

보고서 (2)

(이어서)


반면에 삼성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양과 질 대신 속도와 디자인을 택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처음 삼성에서 와서 맡은 업무는 공장 내 시설물 투자였는데, 마포 H사에서 배운 방식대로 하나하나 꼼꼼히 검토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부장님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꼼꼼히 하는 건 좋은데, 상사인 나도 믿어 봐. 니가 실수하더라도 그걸 책임지기 위해 상사인 내가 있는 거잖아. 지금처럼 검토만 하다간 시작도 못해보고, 시간 다 가서 실수할 기회도 없겠어."



내부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은 업무 목표가 자주 바뀌고 긴급을 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황이 실시간으로 변하고, 여기에 맞추어 회사의 대응 방안도 바뀐다. 이 속도에 맞추어 빠르게 변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 보니 디테일보다는 방향성을 우선하게 되고 일단 업무의 큰 틀이 정해졌으면 시작해본 후, 자세한 건 나중에 수정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아마 이런 식의 업무처리를 선호하게 된 건 반도체 업계의 특성상 기술 혁신이 빠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IT 기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무어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의 CEO였던 고든 무어가 발표한 법칙이다. 반도체는 2년마다 성능이 2배가 된다는 법칙인데, 실제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반도체의 발전 속도를 보면 이 법칙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그만큼 빠른 반도체의 기술 개발 속도를 따라잡다 보니 당연히 속도 지향적인 업무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한 가지 적응이 잘되지 않았던 점은 디자인이다. 이건희 회장은 평소 디자인이 경쟁력이라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 곳곳에 붙어있는 인쇄물부터 크게는 건물이나 공장의 조경까지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 든다. 심지어는 사내 이메일로 오는 홍보물도 깔끔한 레이아웃에다가 최신 트렌드에 맞춘 폰트까지 얼마나 잘 꾸미는지, 내용보다 디자인에 감탄할 때도 많다.



반면에 보고서를 쓰는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수많은 예시로 보는 안목이 한껏 올라가 있는 상사의 눈에 웬만한 보고서는 눈에도 안 찬다. 특히 이 회사는 보고서를 주로 PPT 한 장으로 만드라는 지시가 자주 내려오기 때문에 어떨 때는 내용을 작성하는 시간보다 꾸미는데 시간이 더 많이 들곤 한다. 커다랗고 눈에 딱 들어오는 키워드로 제목을 달고, 이를 뒷받침하는 깔끔한 표와 알록달록한 그래프를 그리다 보면 가끔씩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PPT 깎는 목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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