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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훈 Oct 07. 2019

그룹사 연수 이야기

요즘은 좀 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보통 그룹사로 채용을 진행하며 합격 후 제일 먼저 그룹사 연수를 받는다. 그룹사 연수에서는 해당 기업의 역사와 핵심 가치, 인재상 등을 배우고 실무에 투입되었을 때 필요한 스킬들을 교육받는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신입사원 연수를 통해 갓 졸업한 대학생들을 즉시 투입이 가능한 전력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또한 해당 기업의 충성스러운 -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회사에 자부심을 가지는 사원으로 만드는 세뇌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 회사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앞으로의 교육도 의미가 없으니까, 어찌 보면 그룹사 연수가 앞으로 이루어질 수많은 HRD(Human Resourse Development)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순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입사원이 제일 처음 받는 그룹사 연수는 각 기업에서도 공들여 준비하는 교육과정이며 해당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은연중에 드러나게 된다.



효성에서 연수를 받으며 생각했던 것은, 이 회사는 실무와 디테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라는 점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는 공을 사 오라는 지시를 받았던 이야기이다. 이 교육은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교육이었는데, 강사님과 롤플레잉으로 과정이 진행되었다. 아마 제일 어리바리해 보였던 모양인지, 강사님은 강의실 제일 앞에 앉아있던 나를 지목하시고는 공을 하나 사 오라는 지시를 하셨다. 나는 이미 LG에서 3개월 동안 인턴을 해보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일하기를 원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강사님에게 공손하게 "어떤 공 말씀이십니까?", "공은 몇 개나 사 올까요?", "예산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등을 다시 물어보았다. 강사님이 투덜대며 "실패해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가 있는데, 정답을 말해서 재미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난다. 이처럼 효성에서는 당장 현장에 나가서 부딪치게 될 상황과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전화로 보고하는 법, 업무 메일을 작성하는 법, 심지어는 명함을 교환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배우는 시간이었다.



반대로 삼성의 그룹사 연수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앞으로의 무한 경쟁에 대한 예고편 같았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연수원에 처음 들어가 우리 팀을 담당할 지도선배를 선정하는 과정부터가 그랬다. 우리 팀원을 소개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발표하는 경쟁 PT를 진행한 후, 서로가 매긴 점수를 바탕으로 1등부터 지도선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연수원에서 진행하는 거의 모든 과정에는 금, 은, 동메달이 걸려있어 각 팀 간 경쟁심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메달 좀 못 받는다고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받는다고 인사고과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리 팀원들끼리 밤을 새가며 열심히 매달렸는지 웃음이 나온다.



교육 내용도 효성과는 좀 달랐다. 글로벌 IT기업답게 모든 연수생에게 노트북을 나눠주고는 내부 인트라넷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비즈니스 매너 등 기본적인 교육사항은 동영상 강의로 대체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주로 교육 시간에는 팀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다. 베트남 시장에서 삼성의 비즈니스 분석 등 프로젝트가 정해지면 소규모 그룹별로 제한 시간 내 보고자료를 만들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미 신입사원이 기초적인 능력은 다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어떻게 다양한 담당자와 협업하여 실무를 진행할지 연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발표는 정말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처음에는 15명 정도 되는 팀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연수원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크레톤 우승 팀의 경우) 전국 각지에서 모인 그룹사 연수원 기수 전체 (약 500명 정도) 앞에서 발표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도 팀원들 앞에서 프로젝트 발표는 거의 매일 했었고, 매일 아침 연수 시작 전 대강당에서 200명 정도 되는 연수생들 앞에서 자유 발표를 하는 시간도 있었다. 대강당 발표는 모든 연수생들이 한 번씩은 해야 돼서 발표에 자신이 없는 연수생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다.



회사의 핵심가치와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회사 간의 차이가 잘 드러났다. 효성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창립자 조회장님의 위인전(!)을 읽고 교훈을 서로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 팀을 담당한 강사님은 차분하시고 큰 목소리 한 번 내시지 않은 분이라 우리끼리도 교회 예배시간 같다고 이야기했다. 21세기 신입사원에게 창립자를 우상화하는 교육은 너무나 괴리감이 커서, 오히려 우리 팀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위인전 시간은 이상한 내용이 나와도 쓸데없이 강사님과 싸우지 말고 빨리 끝내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삼성에서는 애초에 그룹사 역사에 대해 길게 배우지 않기 때문에 이병철 회장님에 대한 이야기도 별로 들은 것이 없다. 다만 효성과 마찬가지 인건 이건희 회장님의 어록(!)을 읽고 외우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록 내용과 삼성의 핵심가치 키워드를 바탕으로 연수원 중간에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 어록에는 그 유명한 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특히 좋아하시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 어머니는 늘 '왜 마누라는 안 바꾸냐, 나도 남편 바꾸고 싶다'라고 강조하셨다 - 부분이 나오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삼성 연수에서 그룹사 역사보다 더 강조했던 내용은 삼성물산 불공정 합병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에피스 분식회계 사건 등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의 반박이었다. 나는 그룹사 연수에 들어오기 전에 삼성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찾아보았는데, 특히 그중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그룹사 인사담당자의 반박을 들으니 더욱 재미있었다. 누가 봐도 삼성 찬양으로 교육 내용이 흘러간다 싶으면 나와 같은 중고 신입들은 강의실 맨 뒤로 모여 구시렁대는 것으로 지루한 교육시간을 버티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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